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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산톡톡 Aug 19. 2023

영웅 그리고 마왕

30년 전 습작, 추억

[영웅 그리고 마왕]

     전장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비참한 것이었다 . 검은 핏빛 웅덩이로 반쯤 몸을 드러낸 부러진 검 , 부서진 바퀴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시체들 . 하늘 위로는 까마귀가 날고 ,  멀리서  하이애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짙게 깔린 구름 너머로 태양이 음산한 색조를 띄며 빛났다 . 뒤늦게 이곳에 도착한 만델스는 묵묵히 사방을 바라보았다 . 피가 작은 개천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 만델스의 묵묵한 얼굴 한가운데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내가 너무 늦었구나 . "
 
     그가 검을 대지에 내리 꽂으며 외쳤다 .
 
     " 나도 이 전우들과 함께 마왕의 군대를 물리치고 , 사악한 마왕의 최후를 보고 싶었건만 , 동료들만 먼저 보냈구나 . "
 
     이번에는 하늘을 보며 외쳤다 . 그의 씁쓸한 자조 , 한동안  망자에  대한 축복과 파멸된 것으로 보이는 사악한 적에 대한 저주로 이어져 나갔다 . 그러나 그의 음울한 심정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그래 , 사람들은 죽었지 . 하지만 마왕은 피했다네 . "
 
     만델스가 고개를 들었다 . 다소 조롱기가 섞인 목소리 . 조금은  음산한 . 어느 한 죽어가는 병사였다 . 심한 출혈로 인해 얼굴은 희게  물들었고 ,  많은 상처로 인해 소생은 힘겨워 보였다 . 다가서는 만델스를 그는 손을 들어 만류했다 . 그리고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무의미하게 날려 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표정으로 , 힘겨웁게 몸을 일으켰다 .
 
     " 처참한 전장이었지 . "
 
     그는 심하게 기침을 했다 . 핏덩어리가 한움큼 쏟아져 나왔다 .
 
     " 모든 마왕의 수하들을 죽였어 . 하지만 마왕 그 자신은 몸을 감추는  망토를 쓰고 사라졌다네 . "
     " 그럼 제가 마왕을 찾아내겠습니다 . 그리고 이 검으로 그의  목을  잘라 망자의 원한을 풀겠습니다 . "
 
     만델스의 떳떳한 말에 , 그는 쓰디쓰게 웃었다 . 아니 고통에  겨워  우는 표정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는 게 옳으리라 .
 
     " 그래 . 그것도 좋을 거야 . 만델스 그대는 왕국 최고의 영웅이니까 . 하지만 , 그건 그림자에 불과해 ... "
 
     그리고 그는 이내 쓰러졌다 . 만델스가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 그리고 일어섰다 .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 검날이 음산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분노와 저주의 주문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
 
     그로부터 오랜 세월 , 만델스는 마왕을 추적했다 . 북왕국으로부터 남왕국으로 , 서역으로부터 동방으로 . 바다를 건너 . 산맥을 넘어 . 그의 추적에  얽힌 이야기는 이 짧은 글에서 언급될 만한 것은 아니다 . 만델스는 수많은  전투와 전쟁에 참여했고 . 마왕의 수족이라 자처하는 군대들을 파멸시키는 것에  일조했다 . 때로는 지휘관으로 , 때로는 무명 용사의 모습을 하고 . 그리고  마왕이라 여겨지는 강인한 적을 수없이 파멸시키기도 했다 . 그럴 때마다  만델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영웅이 되었다 . 만델스는 과거에 자신이 전장에 늦게  도착한 것을 불명예로 여겼기에 , 항상 다양한 가명을 이용했고 , 그러하였기에 마왕을 물리친 영웅은 수없이 많았다 . 하지만 그 평화는 잠시 , 만델스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 죽은 이들의 복수를 했다는 감정에 몸을 뉘일 즈음이면 , 어디선가 항상 마왕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바람쳐럼 밀려오곤 하는 것이다 .
 
이 끝없는 궤적은 구슬픈 형태로 이어졌다 . 언제 이 추적이 끝날지  몰랐기에 만델스는 자신의 노화가 언제나 두려웠다 . 그래서 그는 동방의 섬에 찾아가 고명한 마법사에게 불사의 약을 지어 달라고 청했다 . 그 고매한 현자는  만델스가 불사의 약을 마시고도 남을 만한 업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이 약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 다만 마지막으로 씁쓸한 여운을 남겼던 것만은 사실이다 .
 
     " 나도 이 불사의 약은 마시지 않는다네 . 그리고 아무에게도  지어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 . 하지만 자네의 업적은 실로 빼어난 것이고 , 그  임무는 막중한 것이기에 지어 주도록 하지 . 하지만 슬픈 운명의 사슬에   자신을 영원토록 매어 두는 것은 그다지 지혜로운 일은 아니라네 . "
 
     그리고 만델스가 떠나간 뒤 오랜 세월이 지나고 , 그  현자는  임종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
 
     " 이제 불사의 약을 만드는 법은 영원히 폐기될 것이다 .  왜냐하면  나는 평생 불사의 약을 단 두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첫번째 것은 , 나와 절친한  동료였던 이가 마셨다 . 하지만 그는 탐욕이 많았기에 변절했고 .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 그리고 두번째 것은 전설적인 영웅이 와서 마셨다 . 그는 고매한 이가 될 수 있었겠지만 , 끝없는 복수와 증오심에 자신의 영겁을 맞추었기에  그것을 마셨다 . 내가 평생에 저지른 이 두개의 극점에 대한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될것이다 . 또다른 색깔로 , 또다른 문양으로 . 하지만 잘 기억해 두어라 ,  원래는 같은 마왕이다 , 원래는 같은 영웅이다 . 이것은 너희들만 알고 있어라 . 이것이 현자의 궁극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 "
 
불사의 약을 먹은 이는 죽을 수가 없다 . 그래서 만델스가 아무리  마왕을 죽여도 마왕은 어디선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 이제 만델스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 시간은 끝없이 흐르고 , 수많은 왕국이 일어났다 붕괴했다 .  마왕은 새로운 문양과 마법을 빌어 등장했고 , 만델스는 항상 새로운 가명을 사용했기에 . 세상에는 언제나 새로운 공포의 존재와 또다른 영웅이 등장하곤  했다. 그리고 결과는 항상 영웅의 승리였다 . 비록 마왕의 파멸과 또다른 마왕의 등극 사이에는 수십년 내지 수백년의 시간이 존재하곤 했지만 , 이내 만델스는  마왕이 다시 일어설 것을 알고 있었다 . 마왕도 심연 속에서 자신을 회복해  나가면서 또다시 그 영웅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양쪽 모두 상대방이 불사의 약을 취한 이라는 것만은 모르고 있었다 . 그래서 그들은 항상 상대를  원망했다 . 자신의 꿈이 달성되지 못함에 신을 저주해야만 했다 .
 
사가들은 항상 새로운 마왕과 영웅의 이름을 기록하곤 한다 . 그리고 아이들이 즐기는 영웅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와 신비로운  문양으로 치중하곤 했다 . 그리고 음침한 검은 힘은 신봉하는 이들이 섬기는 마왕은 항상 더 강하고 더 신비로운 마법으로 치중하고 했다 . 그러나 그들은 본래  같은 사람이다 . 모두 영겁의 반복에 쌓인 저주의 존재들이다 . 마치 무한의 공간을 달리는 유성의 숙명처럼 , 그들 둘은 언제나 반복된 원형을  행해야만  하는 운명의 유배자들이었다 . 그 둘은 언제나 회귀한다 , 그리고 탄생하고 소멸한다. 역사는 그들의 감추어진 변증법이다 . 만일 그 둘이 이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역사의 매콤한 안개는 그 자취를 감출 것이다 . 그 순간 매혹의 커텐은  찢겨지고 냉혹한 현실만 남을 것이며 , 수많은 고대의 신화와 전설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래서 ' 현자의 궁극적 비밀 ' 은 침묵 속에 남는 것이다 . 오로지 동방의  섬에서 대를 잇는 최고의 현자만이 이를 안다 . 그래서 그는 비밀을 지킨다 .  모든 것은 광기와 이성의 영역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다 .

지금도 , 그리고  미래도 - . 아마 과거도 그리했을 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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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그리고 마왕]


30여년 전 습작 중 하나를 꺼내 보았습니다.


조금은 갑갑했던 고등학생 자율학습 시간, 선생님의 눈을 피해 대략 1-2시간 만에 써 내려간 단편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움베르트 에코 선생께서 존경과 질투의 마음을 담아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에 구시대를 수호하는 악역(?)으로 출현시키기도 한 '천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심취할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세상의 본질을 새롭게 해석하는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마법'이었고, 너무나 닮고 싶었던 '실력'이기도 했습니다.


엄하기만 했던 국어 선생님이 우연히 습작 노트를 보시고는, 학교 앞 부대찌개 식당으로 데려가서 지역 작가 선생님께 인사도 시켜 주시며, 대학 가면 한번 맘껏 써 보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당시 교복을 입고, 받아 마셨던 소주 한잔이 몹시 쓰면서도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40대 중반을 넘긴 아저씨가 되어 다시 꺼내보니 부끄럽기도 하고 가슴도 두근거립니다. 서툰 문체 뒤로 그리웠던 옛 시절이 비춰 보여서인 것 같습니다. 늦은 밤 학교 언적을 내려오며 꿈들을 이야기하던 옛 지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 있을까요.


#영웅그리고마왕 #보르헤스 #습작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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