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짜리 계약직으로 5년 근무
“저 잔업 수당도 있고, 퇴직금도 있어요.” 결혼 이민여성, C가 말했다. 공장에서 일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주사기 만드는 공장이고, 같이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은 모두 이주여성이라 했다. 그의 직장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현재 가족센터)에서 5년간 일했다. 나름 전문직에서 공장으로 이직한 것이 저렇게 기쁜 일인가? 나의 일자리에 대한 통념 속에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공장에서의 급여수준은 센터에서와 같다. 최저임금 수준이다. 매년 최저임금이 올라야 그의 급여도 오른다. 신입사원과 항상 월급 수준이 같다. 다른 점은 새로운 일자리에서는 근속에 대한 호봉이 있고, 퇴직금도 있다. 그리고 식사도 무료로 제공된다. 잔업 수당이 있다. 그래서 그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잔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직장 동료가 비슷한 처지의 여성이라 분위기도 좋다고 했다. 이렇게 그가 만족하는 것은 바로 전 직장과의 비교 때문이었다.
전 직장에서는 매년 10개월짜리 근로계약서를 썼다. 매년 팀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하는 일과 일하는 책상은 동일했다. 그가 10개월짜리 근로계약서를 써야 했던 것은 특별히 직무능력이 떨어져가 아니었다. 그의 일은 이중언어를 활용하여 이주여성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사자인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베트남어, 캄보디아어, 중국어, 태국어, 러시아어를 하는 이주여성이 있다. 그들은 해를 거듭하면 무기 계약직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버티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C는 자신이 대학 졸업장이 없고, 자격증이 없어서 자신의 위치가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을 마친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센터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R은 러시아어 통번역과 상담을 했다. 그는 결혼 후 한국 검정고시를 보고, 지역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다문화 여성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 마침 지역에는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결혼이민여성이 있었다. R은 그 선례를 따라 자신도 정규직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R에 대한 처우는 대학 졸업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R도 이후에 공장으로 이직을 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일이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억울한 마음이 커져서 더 이상 일을 계속 할 수 없었다.
5년 전과 비교하여 대우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근로조건은 일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과 같다. 그 기간 동안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선주민들은 중간 관리자로 승진했다. 결혼이민 여성이 받는 처우에 대하여 같이 분노해주는 선주민 동료는 없었다. 당연한 불문율로 이해되고 있는 듯했다. C와 R은 공공기관에서 이런 차별이 버젓이 일어난다는 데에 더욱 실망했다. 자신들은 계속 선주민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것,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자격증이 많아도 취업이 어려워
T의 집 진열장에는 커피 바리스타, 미용, 네일 아트 등 자격증이 마치 상장처럼 진열되어 있다. 이중 언어를 이용한 취업은 기회가 아주 적었고, 일은 힘들지 않지만 대부분 수입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시간제였다. T는 이전에도 많은 직업을 가졌다. 동네 식당에서부터, 공장까지 많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안정적이지 않은듯하여 자격증에 도전을 했다. 자격증이 있으면 곧 안정된 일자리가 생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고용주들은 이방인을 꺼렸다. 실제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정도 또는 그 이상의 한국어 구사가 가능했으나, 발음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피부색이 조금 검어서 튀가 난다고 거절당한 적도 있다. 손님들이 이주민을 꺼린다는 이유였다.
사실 직업훈련 기회는 적지 않았다. 결혼이민자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정책 하에 각종 기관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취업은 책임져주지 않았다. 연계가 되어도 인턴 정도의 기간이었다. 지금 있는 자격증은 어쩌면 사장될지 모른다. 그러나 T는 다시 자격증을 따려 한다. 그것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이다. 몸을 많이 쓰는 일이라 하니, 선주민들이 이러한 일을 꺼려 할 것 같았다. 또한 동네 어른들을 보니, 이에 대한 일자리는 많을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결혼이민여성, 농촌지역으로 결혼 온 여성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은 남편들도 바라는 바였다. 대농이 아닌 이상 농업이 안정적 수입원이 되고 있지 못한다. 오히려 적은 액수지만 고정적 수입원이 가계에 필요하다. 그래서 부인이 일자리를 갖는 것을 원한다. 집에서 부양할 가족이 없거나, 자녀가 영유아가 아닌 경우는 대부분 그랬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인 여성들은 집 밖의 생활이 필요했다. 선주민 여성과 마찬가지로 장기적으로 자신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길 원한다. 또한 국제결혼가정도 한부모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한부모 이주여성들은 한국에서 기댈 곳이 전혀 없다. 그래서 그들이 자녀와 함께, 혹은 홀로 자립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농업 일을 떠난다. 현금성이 강한 일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일자리의 기회는 아주 제한적이며,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불안하고, 선주민과 다른 차별이란 장애를 감수해야 한다.
더 높아진 장벽
앞서 이야기한 여성들은 한국에서 15년 넘게 살았다. 이들이 직장인으로, 경제적 독립성을 가지려 노력한 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 된다. 이들은 쉰 적이 없다. 일자리를 찾으면서도 일을 했다. 자격증을 준비하면서도 일을 했다. 경제적 취약층인 선주민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선주민보다 더 많은 노력, 다른 종류의 인고를 갈아 넣어야 했다. 바로 인종차별 때문이다.
결혼이주여성들의 한국생활이 길어지면서, 초창기의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넘어 다른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처음에는 적응의 어려움이 자신의 한국어 실력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어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져도 그 적응과 정착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경제적 자립, 독립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 범위를 넘은 장벽이 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평등한 기회를 달라고. 이에 답하고 해결해야 할 당사자는 누구인가?
제3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2018-22년)에는, 결혼이민 여성에 대한 정책적 목표가 분명히 나와 있다. 이제는 가족정책이 도입기, 적응기를 거쳐 정착기에 맞게 정책을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결혼이민여성들의 사회진출 욕구 증대 및 경제사회적 참여를 강화한다는 목표설정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혼이민자들의 경제사회 참여를 강화한다는 목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결혼이민자에게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교육훈련의 프로그램을 많이 제공하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선주민, 이주민 모두 평등하게 일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2023년에는 제 4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이 시작된다. 새로운 해에는 이러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해가 되길, 진정으로 결혼이민 여성이 정착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