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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Dec 28. 2022

눈길이 더 이상 낭만적 풍경이 아닐 때

눈이 오면 굳어지는 몸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요∽” 코미디언, 맹구의 유행어다. 하늘에서 눈이 내려온다는 말이 왜 우스웠을까? 이 말을 할 때 맹구의 일그러지는 얼굴과 목소리 톤이 웃음을 유발시켰다. 이제는 맹구가 그 말을 해도 웃음이 날 것 같지 않다. 하늘에서 눈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덜컥 겁이 난다. 이제는 눈길이 더 이상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다.      


최근 며칠 동안 폭설이란 재난 메시지가 모바일로 계속 떴다. ‘외출시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세요’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 안내를 보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나에게는 고립하라는 경고로 들렸다. 자가용을 타고 사고가 나면, 운전자뿐만이 아니라 주변 차까지 사고가 연결되니 조심해야 한다. 또한 도로 상태가 안 좋아서 교통체증이 생기니 자가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대중교통 이용하기는 쉬운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걸어가는 것이 작은 시련이다. 눈 오는 날, 눈이 쌓인 날, 거기에 한파까지 겨울임을 뽐내는 날씨에 고령층의 걸음걸이를 봐라.      

 

내가 사는 낡은 다세대주택 단지는 언덕 위에 있다. 비탈진 골목길을 내려갈 때는  폴더 폰처럼 몸을 최대한 숙여서 걸어야 한다. 평지도 쉽지 않다. 미끄러운 길을 안전하게 걸으려면 걸음걸음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 미끄럼 방지를 위한 신을 신었으나, 신이 살짝 미끄러질 때 온 몸이, 상가 앞에 있는 긴 풍선 인형처럼 너풀댄다. 마치 걸음을 배우는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걷는 나의 앞으로,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슬리퍼를 신고 뚜벅뚜벅 청소년이 걸어가고 있다. 또 20대 정도의 여성이 한 손에 아이스커피가 든 플라스틱 컵을 들고 걷는다. 저들의 탱탱한 걸음걸이가 내 몸의 취약함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고립되는 고령층  

우리 동네에는 유달리 고령층이 많이 산다. 걸음이 불편하신 분들은 보행보조기, 노인유모차를 밀고 다니신다. 다행히 주변에 작은 슈퍼가 있고, 배달서비스도 좋은 편이다. 그러나 동네 어르신들은 배달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4만 원 이상 구매액을 채우지 못해 한두 개 물건을 사서 직접 나르신다. 이런 장보기도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다. 가까운 곳에 장보기가 가능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면으로 나가야 장을 볼 수 있는데, 거기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다. 면에서 읍으로 가는 버스도 하루에 1-2회뿐이다. 시골에서 홀로 사는 가구가 늘고 있지만, 복지차원의 교통서비스는 기대하기 힘들다.         


나는 올해, 치악산 아래 작은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사로 일했다. 글쓰기 수업은 작은도서관에서 진행되는 문해교실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걸어서 5분 거리에 면사무소, 농협, 복지관, 작은도서관이 모여 있다. 그런데 여성이 대부분인 문해교실 참가자들은 면에서 떨어진 곳에 산다. 자신들이 사는 곳과 면을 연결해주는 버스가 없어서, 문해교실 선생님들이 자신의 차로 학습자들을 모셔 와야 했다. 그런 수고가 없다면 문해교실은 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학습자들의 나이는 평균 70세 이상이다. 조금 젊었을 때 글을 배웠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셨는지 내가 글쓰기 시간에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운전이라고 답했다. 운전면허증은 시골살이에서 필수적이다. 그 필수적인 것을 못하고 살았다. 이제는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지만 나이가 너무 들었다. 가지고 있던 운전면허증조차 반납을 요청받는 때이다. 이제는 운전을 했던 배우자들이 저 세상으로 가고, 자식들은 타지로 떠나고 없다. 홀로 계신 학습자들은 더욱 고립된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워낙 운동신경이 무디고, 겁도 많아서 아직도 ‘초보’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운전하는 나를 학습자들은 부러워할 것이다. 나또한 느리고 불안한 운전을 하여도, 운전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을 때가 많다. 시골에서 일체의 속세 생활을 차단하고 면벽수행하는 도인으로 살기로 작정을 하지 않거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은둔자들이 아닌 이상, 이동수단이 없이 사는 것은 힘들다. 


교통약자로 살아보니 

작은 도시에 사는 나와 시골에 사는 언니들의 예를 보았듯이, 교통약자가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건장한 성인으로서 살아갈 수는 없다. 몸이 늙으면 비장애인도 장애인이 되어간다. ‘자가용 또는 대중교통’, 이러한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은 비장애인, 비고령층, 도시인이다.    

  

난 오늘도 미끄러지지 않으려 힘을 주고 걸으며, 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주 제한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고령층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궂은 날씨에 그들은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쾌청한 날씨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 주변부에서는 유난히 장애인을 보기 힘들다. 그들이 없기 때문일까. 왜 유독 이런 지방에 없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며, 찾고자 하면 보일 것이다. 아직은 작은 지방에서는 작은 소리라도 낼 수 있는 장애인 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장애인들이 보호시설에 수용되어 있고, 그들의 이동은 극히 제한된다. 지역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지역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비장애인, 비고령층에게 공기와 같은 자유가 다른 계층에게는 희박하다.      


온몸에 힘을 주어 걸어서인지, 어깨와 등이 뻐근했다. 버스에 올랐다. 모바일로 뉴스를 읽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이 잠시 중단되었던 지하철 시위를 내년 다시 재개한다는 소식이었다. 잠정 중단의 사유는 2023년 예산안 통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절망스럽다. 전장연이 요구한 예산액은 차치하고, 여야가 증액하기로 합의한 내용을 윤석열 정부, 기재부가 수용을 거부하였다. 이에 전정연은 성탄절에 발표한 논평을 통해 “2001년 1월22일 오이도역 지하철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1년간의 외침은 22년간의 외침으로 넘어간다”고 밝혔다. 전정연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서 서울시는 손해배상으로 대응하겠다고 한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탄절이다.       


점점 장애인이 되어가는 나에게 전장연의 시위는 그저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이슈 중 하나가 아니다. 그들의 투쟁이 바로 나의 안전,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장애인은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이 글에서 사용한 ‘이동권’, ‘교통약자’라는 용어도 그들의 끊임없는 외침 때문에 일반인이 이해할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비장애인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 ‘무고한 시민 대 전장연’이란 프레임으로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대립시키는 구도가 얼마나 자의적인가.     


22년의 외침으로 이어지는 전장연의 요구(장애인권리보장법, 장애인의 이동권, 탈시설 지원, 평생교육, 특수교육 보장 등)가 새해에는 부디 모두 이루어지길. 작은 지방에서도 그 요구가 함께 이루어져 장애인을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기를, 그리고 장애인이 되어가는 고령층에게도 그들의 요구와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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