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일 주일 전에 읽었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의 어렸을 때 그리고 성인이 된 현재까지를 기억하는 유일한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다. '한 여자'는 딸의 곁에 있었던 어머니와, 억척스럽고 독립적인 가장, 중산층인 척 하는 열등의식이 강한 여성이 모두 들어 있다. 작가의 어머니를 넘어선 하층 여성들의 삶을 보게 하는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 이 사회적 접근은 나 같은 독자의 취향에 맞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 직전의 모습을 마치 엑스레이를 보듯 상세히 기록한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읽다가 중단했다. 나도 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치매, 요양원 생활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글이 살아있다. 작가가 말하는 상황이 내 눈에서 짙게 펼쳐진다.
글 속에서 어머니가 떠올려지고, 그 곁에 내가 있어서 자꾸 내가 그 분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라서 죄스럽다. 곧 지나갈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었야 했는데, 그 당시는 모두가 두려워 직시하지 못했다. 피했다. 아니 어머니의 상황이 아니라, 내 일이 우선이었다. 곧 이 생을 떠날 분이라는 것을 조금 더 인식했다면 좀더 다가갔을 터인데. 김연수의 책, '그트록 평범한 미래'처럼 나는 왜 그때 미래를 깨닫지 못했을까. 우리의 미래는 지금의 모습을 못 벗어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나의 상황, 상태, 태도에서 상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변을 보면서 상상할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아니라 우리 손에 잡히는 미래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를 중단한 가장 큰 이유는 내 현실 때문이다. 이제는 고령층이 된 나이, 이 책 속의 상황이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나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건강약자에 속하는 나에게, 어느 악령 영화 속에서 악령이 다가오는 전조로 보여지는 검은 안개가 책을 통하여 스물스물 다가오는 듯 하다.
상세한 사실적 묘사가 더욱 나를 힘들게 한다. 그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엄마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엄마가 아닌 내가 그 속에 있다. 난 이 글을 누구에게 읽히고, 누가 날 이렇게 봐주길 원할 수있을까. 생각이 이렇게 이르니 더 난감하다. 혈육이 없는 나에게 작가의 눈처럼 봐 줄 사람이 없는데.
새해 초에 이런 글을 읽을 이유가 없다. 연시에는 없는 희망도 한번 마음에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을 넘는 환상을 한번 꿈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아픈 현실이 그대로 투영되는 미래를 보는 것은 조금은 늦춰도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