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저만치 혼자서> 리뷰
<하얼빈>을 읽으면서 김훈 작가에 대하여 새삼 놀랐다. 작가가 후기에 쓴 것처럼 책은 젊었다. 전작들에 비해서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보였던 날 불편하게 했던 요소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김훈 작품에서 간간히 보이는 여성과의 성관계, 몸에 대한 묘사는 극히 불쾌하다. 생명을 가진 여성이 아니라, 그저 타자화된 여성으로 보인다. 지극히 남성적 시각으로 여성의 몸을 본다. 대표적인 것이 <화장>이나 <언니의 폐경> 등이다. 그 스토리라인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병든 여자, 위기의 중년 여자의 몸을 남성의 시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묘사를 너머 해부에 가까웠다. 너무나 적나라했고, 동정보다는 혐오스럽게 했다. 그 책을 본 대부분 여성독자들은 불쾌했을 것이다. 여성작가의 몸에 대한 묘사와는 달랐다. 글 속에 여성 몸이 가지는 변화, 고충이 공감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몸으로 만들고 잇었다.
<칼의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생과의 잠자리에 여자 사타구니에서 새우젖 냄새가 난드는 듯한 묘사가 거슬렸다. 작가는 종종 동물적 후각을 이용하여 여성을 묘사한다. 그런 부분이 현실적이고 자극적이지만 내 오감을 자극해서인지 싫다. 그런데 여성의 몸에만 적나라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상황을 칼같이 도려내며 묘사를 한다. 그래서 좋아하지만, 여성의 몸에 대한 묘사는 건너뛰고 싶다.
그럼에도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을 좋아한다. 사실 역사소설이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 김훈 작가의 작품이 주는 차갑고 허무한 역사의식 그러면서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잔한 마음에 끌린다.
<<저만치 혼자서>>는 단편집이다. 마치 세밀화를 보는 듯한 풍경 묘사로 시작되는 글이 처음부터 스토리라인과는 상관없이 삶의 고단함을 담는다. 실린 작품 중에 늙은 인물을 그린 것이 많다. <명태와 고래>,<저녁 내기 장기><대장 내시경 검사>. 나이를 들어가면서 볼 수 있는 풍경을 늙은 작가가 썼다. 늙은 독자인 나의 풍경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은 자만이 쓸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감히 생각이 들었다.
<저녁내기 장기>였다. 오개남과 개와의 인연을 읽는데 가슴이 저려왔다. 유기견의 신세와 유기된 생명처럼 살아가는 오개남.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위로해줄 관계도 만들지 못한다. 주인의 처지가 개를 돌볼 수 없다. 나의 반려견을 물끄러미 보면서 소설 속 인물, 홀로 사는 가난한 인물의 처지가 나와 겹쳐졌다.
이번 작품에서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 소설집의 인물들은 이혼한 사람들이다. 고령화로 나이가 들면 홀로 삶이 되는데, 이들 인물들은 이혼이 있어, 홀로 삶이 더 빨리 시작되었다. 이혼 남녀의 삶이 고독을 더 극대화시킨다.
<대장 내시경 검사>, ㄱ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서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화자는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다. 결국 청소하는 도우미에게 돈을 주고 부탁한다. 마치 내 생활의 단면을 옉스레이처럼 보는 듯하다. 나도 이번달에 위, 대장 내시경 검사 예약을 했다. 그때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당부를 받았다. 2년 전에는 서울에서 위 내시경을 받았는데 대학동기가 와주었다. 이곳에서는 누굴 부를까. 모두 생업으로 바쁜데. 책에 의하면 그런 일을 알바로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도 그래야하나싶다.
<저만치 혼자서>는 죽음에 대한 명상서와 같다. 죽음을 맞이하는 수녀원의 수녀들을 통해 죽음이 주는 의미를 종교적으로 해석한다. 작가가 후기에 밝힌 바와 같이 이는 양종인신부의 제세시 강론을 모아 만든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을 참고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해석이란 바로 양신부의 신앙에 기대어 있다.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을 한번 보아야 할 것 같다.
<저녁 내기 장기>에서 , 유기견과 헤어질 때 꺼억꺼억 소리내어 울었다. 또한 <저만치 혼자서>를 읽다가 울었다. 죽음을 나는 어떻게 맞을 것인가. 난 어쩌면 책 제목처럼 저만치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