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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Apr 04. 2019

꼰대의 글쓰기


가끔 강연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다 싶은 강연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청중인 나와 다른 가치관을 반영한 주장을 할 때이다. 그리고 상투성,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 강연이다.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결론에만 집중해, 그 세부적 내용에는 소홀한 강연이다. 마지막의 경우를 나는 지난 일요일 성당에서 맞닥뜨렸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은퇴 신부의 특강이 있었다. 그 분은 과거 이곳 성당의 신부이셨다고 한다. 강론시간에 특강이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교중미사 시간에 강론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은퇴신부는 약간 들떠 있었다. 그는 많은 준비를 해온 듯 했다. 여느 특강 강연자와 같이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을 하였고, 본 강의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의 강연은 지뢰밭을 밟는 것과 같았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만약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벌을 주시길 원하셨다면 즉시 손을 잘랐을 것이다.”     


내 앞에는 두 손이 절단된 장애를 가진 분이 앉아 계셨다. 그 분의 양 쪽에는 친지들이 앉아서 매일미사 책과 찬송가책을 넘겨주며 돕고 있다. 그런데 그 분에게 저 내용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자신의 장애가 중죄, 원죄의 상징처럼 생각될 지도 모른다. 내 앞에 앉은 그 분의 고개가 숙여졌다. 눈을 둘 데를 못 찾았을 것이다. 신부는 ‘즉시 손을 잘랐을 것이다.’ 대신에 ‘즉시 벌을 내렸을 것이다’라고 전달하면 되었을 내용이었다. 공교롭게(?) 장애인이 참석해서 조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했다. 나조차 얼굴이 화근거리고 고개가 숙여졌다.      


“하늘나라는 장소 공간의 의미가 아니라, 상태이다. ...진선미의 상태이다. ...병이 있는, 암환자라는 사탄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 쭈구렁텅이 할머니의 얼굴이 아니라 포동포동한 젊은 얼굴이 있는 곳이다.”     


미사에 참가한 신자 중 대부분이 나이든 분이시다. 이 지역의 특성이다. 도시가 아닌 관계로 연령층이 높다. 미의 기준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돌릴 수 없는 곳에서 찾다니 논리적 모순은 물론이고, 나이든 신자들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또한 암환자가 사탄의 세계에 있다니, 고통이나 시련의 상태이지 그것이 사탄의 세계인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환자들은 사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병이란 고통 속에서 성당을 찾은 신자들에게는 형벌같은 말씀이셨다.       


“걸레들이 교회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어? 걸레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해주어야지. 아버지의 마음은 그런 거야.”     


세리와 창녀를 예수님이 받아들임을 설명하면서 하신 말이다. ‘걸레’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세상의 거친 비속어, 날 것을 그대로 썼다. 그 분은 그 말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아마도 가장 대중적이며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걸레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듣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어휘라는 것을 모르신다.      


그 분의 강연을 들으면서 신자들은 조용하다. 은퇴신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 분의 말에 찬동하기보다는 신자로서의 예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종교기관에서 사제의 말에 가타부타 토를 다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난 예에 어긋나고 비종교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나도 신부님의 순진무구성에 감탄했다.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열정을 가득한 모습은 감동스러웠다.       


그럼에도 그 분의 강연에서 소위 ‘꼰대’의 전형성을 본다. 신부님 개인의 문제가 아닌 나를 포함한 어른 세대의 인권에 대한 불감증을 새삼 인식한다. 꼰대의 문제는 말의 요지 자체가 아니라, 시대와 세대에 조응하지 못하는 설명에 있다. 좋은 강연과 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논쟁적이라 하더라도 주장이 있으면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치가 있는 강연, 말이라도 해도 감수성이 결여된 언사는 폭력적이다. 그리고 청자와 진정한 감정과 감성의 소통을 이룰 수 없다.      


혹자는 나의 지적이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못한, 숲을 보지 못하고 가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나무가 건강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일대 일 사적 자리가 아닌 공적 자리에서의 말과 글은 자기 수련의 과정임을 다시 새긴다. 지금부터라도 열매만 보지 말고 뿌리부터 잘 관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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