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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Jun 28. 2018

구조되어 가라앉은 자로 살아가는 이유

 리뷰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나크바(대재앙)와 홀로코스트 

지난 5월 15일은,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하여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대재앙(나크바)이 시작한 지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유민이 발생한 것을 애도하는 날이다. 대재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독자는 알 것이다. 올해 트럼프의 미국 대사관 이전 약속은 또 다른 비극을 가져왔다.     


이런 사태를 접하면서 시오니스트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시오니스트의 역사의 주요 부분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과대하게 해석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이 정말 “세계사의 전대미문의, 유일한, 무비의 대형 범죄”였을까? ...지난 500년 동안 유럽 절대왕권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비(非)서구권에 대해 저질러온 학살은, 제2차 대전 때 유대인의 비극을 훨씬 뛰어넘는 경우들이 많다. 유럽인들이 미주대륙의 토착인구에 쓴 무기와 이들을 노예화한 것, 그리고 새로운 유행 질환과 알코올에 의한 대학살이 그 예다.”(박노자,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동시에 홀로코스트가 인종살해의 문화적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염려도 높아지고 있다.  “‘홀로코스트 서부극’ 혹은 ‘홀로코스트 포르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살해를 지원하는 문화적 병참(兵站)이 된다.” (장정일, ‘서구문학의 홀로코스트 집착’)    


그렇다면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 후손은 어떻게 나크바의 가해자가 되었을까? 레비는 <가로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홀로코스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로지 고통을 유발하려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다.” 그러면서 레비는 나치체제처럼 폭력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지만, 폭력이 확산될 전조는 어디든지 있다면서 경고했었다.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의 교훈, 인류가 폭력에 취약하다는 것을 바로 증명한 것이 팔레스타인 사태이다. 프리모 레비의 날카로운 인간에 대한 성찰은 시오니스트들과 공유할 수 없는 힘든 교훈이었던 모양이다.     

악의 평범성을 이해하다

프리모 레비는 평생을 절멸수용소(라거)에서의 경험을 증언하면서 절멸수용소가 가능했던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내 임무는 이해하는 것,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중범자들이 아니라 그들, 그 국민들, 내가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 자신들 중에서 SS 대원으로 차출된 바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 믿었던 사람들과 믿지 않으면서도 침묵했던 사람들을, 우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작은 용기,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을 던져주거나 인간적인 말 한마디를 나지막이 중얼거릴 작은 용기도 없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하려는 과정은 레비의 오래된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레비는 거짓말을 하고, 망각을 하고, 분리하는 독일인을 목격한다. 그들은 나치체제의 대학살을 몰랐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많은 독일인이 독일나치체제와 자신을 분리시키고, 자신들도 나치체제에 배신당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레비는 이런 독일인을 보며, 거의 모든 독일인들의 진정한 죄는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민족이 다다른 것은 비겁함이었다, 비겁함이 없었다면 그토록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레비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독일인이 역사의 공범자로서 죄의식이 없다는 것을 레비는 알게 된다. 또한 악의 평범성을 이해한다. “고문자는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인 인간이었고, 평균적인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 이것은 독일인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는 독일인만이 아니라 피해자인 자신에게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희생자로서의 자신과 자기 민족을 특권화하는 대신 그들을 가둔 가해자와 함께 갇혔던 희생자들을, 그들의 내면을 객관화하고자 노력했다. 레비는 생존자로서 부끄러워했다. 수용소에서 동료들과 물 한 컵 나누지 못한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수용소는 최소한의 배려, 관용을 베풀 여유를 허용치 않았다.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고백을 한다.     


레비는 구조된 자로서 그의 의무는 증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의 생활에 대하여 감정적이 아닌 객관적 성찰적 증언을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된 자들의 향방 

홀로코스트에서 구조된 자들의 향방은 나누어졌다. 하나는 홀로코스트를 종교화하여 또 다른 인종주의, 식민지주의를 추동하는 시오니스트들이다. 레비를 괴롭힌 ‘생존 특권에 걸맞지 않은 결과’ 중 하나가 시오니스트였을 것이다. 그는 1982년 8-9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팔레스타인 구역에서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절망을 표현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시오니스트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구별했다.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 수상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고립의 상태 속으로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만 한다.”     


또 다른 생존자는 생존하기 위해 망각하는 사람들이다. 가해자들은 그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마음 깊숙이 그 기억을 몰아내버린다. 그런데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레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계속 고통을 현재화하며 살았다.     


레비와 같이 라거의 고통을 죽을 각오로 다시 마주한 생환자들은 많았다. 책의 한 장인 ‘아우슈비츠의 지식인’에서 그는 ‘장 아메리’라는 철학자를 소개한다. 장 아메리는 또 다른 레비 자신이었다. 장 아메리와 레비, 두 사람은 유대교라는 믿음도 없었다. 독일계 유대인인, 장 아메리는 유대인이란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레비도 이탈리아 고전문학을 좋아하는 이탈리아인이었다. 두 지성인은 인간을 그 자체로가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으로 판단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들에게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안겨준 것은 독일 나치였다. 이들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운 좋게 살아 돌아왔다. 그들은 작가로서 절멸수용소를 증언하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구조되었으나, 가라앉은 자들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힘겹게 고통을 끌어올리며, 죽음을 부르는 고통 속에서 증언을 그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우슈비츠라는 특수한 경험을 뛰어넘어 보편적 인간의 위기를 경고하기 위해서이며, 가라앉은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크바는 두 작가를 영원히 구조될 수 없는 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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