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을 읽으며 시리게 깨닫는 내 삶의 문제들. 풍랑으로, 잔물결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 내가 외딴 섬이라고 산문은 알려준다. 파도의 소리와 그 진동에 매일매일 시달리는 섬이 된다. 들어오는 물결이 전하는 진동에 밤잠을 설치고, 되돌아가는 물결에 소식도 실지 못한다. 그럼에도 섬을 휘감는 파도를 피하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내 산문 독서다. 뭍에서 도망쳐 왔으나 뭍의 소식은 파도로 날 따라왔다. 산문은 내게 세상을 피하지 못하게 한다. 그 글이 세상을 비판하기 위해, 위안하기 위해 쓰였든 마찬가지이다. 물론 모든 산문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산문의 성향이겠지만, 그것들은 나에게 낮과 밤의 민낯을 보여주려 한다.
시를 오랜만에 본다. 세상에 대한 소식을 싣고 날 쫒아오는 산문이 싫어서 시를 읽으려 한다. 내 우주의, 세상의 구체와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록 산문과 뿌리가 같아도 다른 어휘로, 색깔로 쓴 글, 서정을 읽으면서 감상에 취하고 싶다. 술 취한 사람처럼 오래 그 기운에 취해서 휘청거려도. 현실 벽이 주는 암담함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면 좋다.
시는 언제부터인가 어려워졌다. 내가 예전에 접했던 분명한 이미지와 소박한 언어들로 직조되었던 시가 아니다. 내 경험과 감성에 기대어 접근하기 힘들었다. 내가 시를 받아들이는 정서가 극히 상투적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문해가 되지 않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시인들만의 잔치라고 욕을 했다. 황현산 선생님은 문해력이 높은 사람이 시를 읽을 수 있다는 데, 날 찌르는 가혹한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러니하게 시를 거부한 이유 때문에 시집을 찾았다. 내 좁은 행성에 멀리 있는 언어를 집어넣고 싶다. 내 우주가 다르게 팽창하길 원한다. 시를 보면서 세상을 비판적으로, 실천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당위에 내가 답할 만큼 용기를 잃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산문을 곁에 두었었다.
12월 31일 저녁 11시가 넘었다. 내 손에는 작은 책 하나, 박준의 시집. 평소의 시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주길 원하며 집어든 시집. 산문을 피해서 온 시의 세상에 문해력으로 좌절되지 않길 바라며 읽는다.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에 기대어 시를 읽는다. 조금 다르게 읽어도 그 해설이 시와 감응하는 데 편하게 한다. 아. 좋다. 사랑의 시도 좋고, 풍경의 시도 좋다. 문해력이 좋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겨울밤에 조용히 내리는 눈과 같이 시가 덮인다.
내년에는 조금 시를 많이 읽자. 시로 내 새로운 근력을 키우고 다시 세상에 덤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