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프락시스적 활동으로 규정한다면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행위하는 사람 자신이 된다. 그는 특정한 예술활동을 통해서 이제 사물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표현함으로써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활동을 시작한다. ” - 진은영 시인의 <문학상담, 내 마음의 무늬읽기> 중
조지 오웰에 따르면 글을 쓰는 이유에는 네 가지가 있다 한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충동, 정치적 목적이다, 이는 개인적 이유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글쓰는 이유에는 네 가지가 전부가 아닐지라도 조금씩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게 만든 직접적 동기는 쓰는 이마다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그 동기와 다르게 작용하기도 한다. 시작하게 한 이유와 다르게, 글을 쓰면서 생기는 동력이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글은 산책과 같다. 달리기, 속보와 다른 천천히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것과 같다. 속도가 붙지 않은 산책은 무념무상으로 하기 힘들다. 무거운 다리를 옮기다보면, 반려견 때문에 멈춤하다보면, 많은 것들이 떠오르고, 주변의 흐름을 천천히 마주한다. 그러다보면 촉촉하게 땀이 새어나와 있다. 그러한 상념은 질서도 없고 어지럽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뒤죽박죽 새어나오는 것들을 물질화하는 작업이 천천히 글쓰기이다. 천천히 글을 쓰다보면, ‘천천히’ 안으로 많은, 정체가 모호한, 불투명한 것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러면 더욱 천천히 글을 쓴다. 바쁘다는 이유로, 밀어두었던 사건·상황·관계가, 알면서도 직면하기 두려워 피했던 기억들이, 피해자로서 가해자로서 만들어진 상흔이 천천히 온다.
그러면서 글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신음을 언어화하며, 그 언어의 좌표를 만들어간다. 웅켜지고 있던 신호를 하나씩 천천히 펼친다. 펼침막을 보면서 요구를 깨닫고, 누구에게 향하는지 파악한다. 그러면 그 신호가 안 닿은 이유를, 누구가 어떤 모습으로 신호를 받을지 상상해본다. 그러면서 신호는 보내지기도 하고, 다시 글에 남아있기도 한다. 어쨌든 신호는 발사된다.
그 누가 나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글쓰기는 슬픔, 분노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웅어리를 녹인다. 한 곳에 박혔던 덩어리가 연성화되어 번지고, 넓게 온 몸으로 퍼진다. 흐르면서 투명해진다. 그러면서 종종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아픔을 새기는 힘도 기대해본다.
정리되지 못해도, 방향이 묘연해도 그대로 천천히 쓴다. 천천히 글쓰기는 날 보는 의식적 활동이다. 글쓰기는 칼 없이 나의 상처를 도려내어 마주하게 하고, 용서와 위로를 찾는 나의 의식이다. 누구든 그러리라.
내가 글쓰기를 예술적 활동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진은영 시인이 말한 프락시스적 활동으로서 의미는 깊이 동감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마주하는 활동 그 자체의 중요성을. 그러면서 조지 오웰의 말이 새겨지기도 한다. 어떤 글도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내 일상도 정치적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천천히 살아야 한다. 천천히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