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무용으로 만드는 사회

권여선, 아직 멀었다는 말

by roads

계획이 있는 사람들 무너지다

여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을 벗어나려 자신을 옥죄며 살면서, 자신에게 버거운 고통의 부당함을 소리치고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여선의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단편 <손톱> 속, 소희는 출근시간이 한 시간 삼십분이나 걸리는 쇼핑센터 매장에서 일한다. 그녀는 한 달에 백칠십만 원을 받는다. 그녀는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출근 시간을 계산하고, 빚을 갚기 위해서 매일, 매월 지출 계획표를 세운다. 소희는 천오백만원 대출이 있는데, 이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것을 매달 갚는 데 오 년이 걸린다. 여기에 옥탑방 보증금 대출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녀는 보증금 대출에 대한 상환 계획을 짠다. 그리고 옥탑방 계약 기간이 다가와 그것도 계획표에 포함되어야 한다. “소희에겐 계획이 다 있다.” (141)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영화 기생충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는 낙관적인 아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런 아들에 의지하는 아버지가 보인다. 그러나 대사는 계획이 무너지는 미래를 암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감독의 회의적인 세계관을 나타내는 대사다. 계획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다. 기생충 영화 속에 ‘계획’은 우화적이고 농담처럼 들렸는데, 권여선의 ‘계획’에는 불안한 삶의 증표와 빈틈없이 온몸으로 지켜야 하는 비장함이 배어 있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계획은 무슨 계획, 하루하루 사는 것도 팍팍한데.” 이 말에는 계획은 여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으며, 욕망의 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계획이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희망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팍팍한 생활일수록 계획 없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루하루가 반복된 일상. 쳇바퀴 같은 생활이라 해도 그것은 자연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남루한 삶일지언정 자신의 온 몸으로 조심스럽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삶의 바퀴는 금방 이탈한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자신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무게를 감안해서 내딛어야 한다. 살얼음 너머로 가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소희의 계획은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 아닌, 생과 사를 가르는 중요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계획이 그녀를 얼마나 버티게 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같은 소설집에 실려 있는 또 하나의 단편, <너머>에서, 기간제 교사인 N은 학교의 쪼개기 계약에 진절머리를 친다.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는 기간제 교사들의 조건을 학교는 알고 있다. N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어머니와 자신은 닮았다. “활기도 자유도 없이 바짝 쪼그라든, 기한이 없는, 무기의 죽음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N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도록 확연하게 떠올랐다.”(149)


<친구>라는 단편에서는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싱글 맘 해옥이 있다. 해옥은 투잡으로 아들과 자신의 생계를 책임진다. 오전에는 친구를 도와 여성용품을 배달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불평불만하지 않는다. 아들 민우가 학교폭력의 희생자인데도, 그저 친구들 사이의 장난 중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한다. 아들 민우도 자기에게 가해진 폭력을 친구들이 장난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전학을 가야 하는 친구들을 걱정한다. “걔네들 전학 가면 ...불쌍해... 전학이 얼마나 힘든데.”(166) 민우는 엄마가 일자리를 찾아 옮겨 다닐 때마다 학교를 옮겼어야 했다.


소설보다 깊은 현실의 늪

권여선의 소설에 나오는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의 위태위태한 생활은 아주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극단적 사례도 아니다. 미디어에서 고발기사, 논픽션으로 이러한 종류의 사례는 많이 다루었고,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문학으로 담겨진 이야기는 독자가 더 깊은 감정으로 현실과 인물을 만나게 한다. 권여선 소설 속 인물들, 앞에 소개한 인물들은 모두 성실하고, 일하는 곳에서 괜찮은 일꾼으로 인정받는다. 노력이 부족해서 능력이 모자라서 그들이 억울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서 전개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서사 이상을 독자는 상상하게 된다. 작중 인물들의 고통과 불안이 작품에서 묘사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독자는 안다. 계속 위태롭게 지속될 것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독자가 힘든 것은 인물들이 처해 있는 부정의하고 부당한 현실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다. 그 늪의 깊이를 작중 인물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독자는 안다. 작가는 작중 인물들이 처해 있는 위기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말하지 않는다. 작가가 말하지 않는 마음의 무게를 독자는 짊어지게 된다.


막막하고 아득한 하루하루를 견디는 인물들을 보면서 절망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허무하지만, 삶의 동력은 계속된다. 그들에게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소희에게는 자신을 버린 가족일 것이며, N에는 요양병원에서 자신을 못 알아보는 어머니가 있고, 해옥에게는 아들 민수가 있다. 소설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읽는 이들은 숙연해지고, 눈물 가득한 위로를 느낀다.


나는 이 책을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는 동안 읽었다. 현재의 위기와 관련지어 작품이 읽혀졌다. 이야기가 계속된다면, 코로나 사태로 소설 속의 인물은 이전보다 더 극심한 환경에서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소희는 분명히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휴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소희는 대출을 계획대로 상환할 수 없어서 개인 파산을 신청했거나, 잠적을 할 수도 있다. N도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요양병원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코로나 사태 이후 학교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소소하게 이해타산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 해옥과 민수 모자는 학폭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종이에 서명을 하고, 자신들은 다른 곳으로 또 일자리를 찾아 이사를 했을 수 있다. 이들의 계획은 무너졌다. 계획이 거창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아주 작은 계획조차 흔들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없었어도, 이들은 낭떠러지 위에 선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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