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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Jan 01. 2022

느린 걸음으로 소녀와 함께 임신 중지 여행을

영화,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여성 몸에 대한 무시와 무지가 만든 심장박동법     

9월 1일, 미국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임신중지 금지법)인 ‘태아 심장박동법(Fetal Heartbeat Bill)’이 시행되었다. '심장박동법'은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임신 6주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법이다. 연방대법원은 텍사스 법을 중지해달라는 인권단체들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연방대법원 법관들은 트럼프가 지명한 보수적 법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가처분 신청에 대한 기각은 예상되었던 일이었다. 사실상 낙태금지는 텍사스가 최초는 아니다. 2019년부터 앨리바마주는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텍사스는 미국에서 캘리포니아주 다음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주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텍사스 주지사, 그렉 애벗은 “6주는 낙태를 결정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신 6주라는 경계는 여성의 몸에 대한 무지와 무시를 반영한 것이다. 6주는 신체 변화가 없어서 여성이 임신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다. 또한 생리주기가 불규칙적인 경우가 많아서 임신을 알기 힘들다. 이 심장박동법은 낙태 사유로 오랫동안 인정되었던 강간,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도 6주로 묶어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다. 이 법으로 인해서 가장 타격을 받는 여성은 경제적 취약층, 유색인종, 미성년자층이다.      


바이든 정부는 이런 사태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텍사스주의 여성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텍사스주의 법 시행 이후 원정낙태가 늘고 있다.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은 이웃 주로 이동하여 낙태를 하는 또 다른 고난을 겪어야 한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올라온 영화,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Never, Rarely, Sometimes, Always)’는 바로 이런 원정낙태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미성년자의 이야기이다.     

문란한‘ 여자     

영화는 고등학교 학예회부터 시작된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흥을 돋구는 공연이나 부드러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인 오텀은 우울한 표정으로, ’He’s Got the Power‘를 부른다. 가족도 관객석에 있다. 그녀의 노래와 음색은 관객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He makes me do things I don't want to do 

He makes me say things I don't want to say 

And though I try to break away 

I can't stop saying I adore him 

I can't stop doing things for him 

He's got the power, the power of love over me       


노래 중간에 관객 중 한 남학생이 ’slut(문란한 여자)’이라는 야유를 보낸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무덤덤하면서 쓸쓸한 표정으로 노래를 마친다.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힘으로 여자는 자기 의사와 다른 행동을 강요받고, 망가지고, 그리고 slut이 된다. 이 노래의 오리지널은 1960년대에 발표된 것인데, 아주 신나는 노래, 사랑에 빠진 상황에 대한 찬미로 불리어졌다. 그런데 2020년 영화가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17세 소녀, 오텀은 예상치 못한 임신에 직면한다. 그리고 임신중지를 결심한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런데 임신중지를 힘들게 하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주법이다. 자신이 사는 펜실베니아의 법에 따르면, 임신중지가 가능한 경우는 성폭력,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이며, 미성년자의 경우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에 오텀은 자신을 도와주는 사촌과 함께,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 없이 임신중지가 가능한 뉴욕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처한 경제적 조건 또한 그들의 임신중지 여행을 힘들게 한다. 그녀와 사촌은 저소득층 가정의 소녀들이다. 둘은 하교 후 파트 타임으로 슈퍼마켓에서 일한다. 뉴욕으로 가는 여행비를 사촌의 도움으로 구하고, 사촌과 함께 떠난 여행. 그러나 예상치 않게 임신중지 절차 과정이 길어지면서 2박 3일 동안 길에서 잠을 자야 한다. 그리고 여성혐오와 불편한 남자들의 시선, 행동을 견디어야 한다.        


자기 결정의 범위      

이 영화가 특이한 것은 특정 남자와의 관계 즉 로맨스나 멜로드라마적 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텀의 남자친구가 누구이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여행을 아주 느린 속도로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가족계획 상담소(Planned Parenthood)를 찾아가고, 상담하고, 임신중지 수술을 받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또한 임신 중지와 관련된 이슈에 대한 주장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임신중지를 위해 만난 클리닉 상담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오텀이 만난 상담사들은 모두 친절하다. 그러나 그 지향은 다르다. 첫 번째로 간 펜실베니아의 상담소. 그곳에서 만난 의사는 초음파로 태아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아름다운 아기’라고 감탄을 하고, 태아의 박동소리를 들려주면서 ‘기적 같은 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6주 이후에는 생명을 가진 태아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준다. 그리고 임시중지가 아니라 출산할 것을 권유한다. 출산하면 입양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텀은 확고하다.      


뉴욕에서 만난 상담사는 임신중지가 본인의 의사인지 묻는다. 그리고 임시중지 결정을 한 이유를 묻는다. 오텀은 담담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결정이며, 임신중지의 이유는 아직 엄마로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상담사는 남자친구/섹스 파트너와의 관계에 관하여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여성의 건강과 안전에 관련이 깊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질문에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로 답하라”고 말한다. 바로 여기서 영화의 제목이 나온다. 상담사는 성관계에 관련한 여섯 개의 질문을 한다. “파트너가 콘돔을 거부한 적이 있느냐?” “당신의 피임을 방해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상처를 준 적이 있느냐?”“당신이 원하지 않는 섹스를 강제적으로 하게 한 적이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때까지 누구 내게 성적 행위를 강제한 적이 있나?”를 묻는다.       


이러한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냉담한 표정을 지니고 있던 오텀의 얼굴에 격한 감정이 보인다.  숨기고 싶었던 치욕스런 기억, 아픈 기억을 떠올린 표정이다. 그럼에도 오텀은 그녀의 경험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 표정으로 즐겁고 행복한 기억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몇 개의 단어로 응얼거릴 뿐이다. 어린 여자에게 남자들과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처신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복잡하고 선명하지 못한 남자와의 관계는 혼재되어 있다.      


이 질문들은 영화 속 오텀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여성들에게 향한다. 여성 관객도 여섯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답할까.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에 여성은 행복했던 것인가? 평등한 성관계였나? 자율적이고 안전한 임신이었나? 영화는 오텀을 통하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의 실체와 그 관계로 인한 결과늘 누가 책임지는가를 묻는다. 또한 이런 것을 모두 무시한 채 태아의 생명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온당한가.      


노래 가사의 한 라인. “He's got the power, the power of love over me.” 남자가 가진 여자에 대한 사랑의 힘이 만든 임신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 된다. 오텀이 펜실베니아 상담사의 말대로 임신을 계속하여 출산을 한다면 그녀의 생은 어떻게 될까. 그녀는 slut이란 멸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명을 책임지는 멋진 여성으로 존중을 받을까.      


한국의 오텀은 어디에 있을까       

뉴욕주의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은 남성이 다수인 상·하원과 남성 주지사가 결정한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이는 성차별의 구조가 만든 법이란 주장일 것이다. 또한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의 몸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의 미래, 생애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기본적 인권의 침해라는 것이 국제인권단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기존 낙태법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1953년 낙태금지법 제정된 이후 66년 만에 바뀐 결정이었다. 또한 대법원은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와 관련한 대체 입법을 마련하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대체입법은 마련되어 있지 않1다. 정부안에서 민주당 의원 안, 국민의 힘 소속 의원안 등이 발의되어 있으나 그 토론조차 활발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안에는 한국형 심장박동법을 발의한 국민의 힘 의원도 있다.     


또한 임신중지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낙태죄가 페지되었지만, 여성에게 임신중지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10~24주 등 산부인과마다 낙태 시술 제한 기간이나 비용이 다르다. 영화 속 두 소녀처럼 우리의 소녀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어디에선가 어둔 곳에서 자신의 몸을 탓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절망에 떨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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