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 친구가 없는 아이들
산부인과가 없어진 작은 지방
“여기는 산부인과가 있네.” 홍천 읍내로 들어서기 위한 천변 다리를 건너면서 우뚝 산부인과 간판이 보였다. 도시에서는 특별할 게 없는 간판이다. 동행하던 친구의 탄성을 듣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나와 친구가 사는 횡성읍에서 산부인과 간판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대학까지 있는 지방이지만, 산부인과가 없다. 그러고보니 소모임을 같이 했던 젊은 회원들이 임신했을 때, 원주로 산부인과를 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출산도 원주에서 하고, 그 곳의 산후조리원에서 조리를 한다. 처음에 원주에 있는 산부인과로 외래 진료를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작은 지역의 의원을 믿지 못해서 도시로 간다고 생각했었다. 이 곳의 의료시설과 의료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아예 없어서 주변 도시로 원정출산을 가는 것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비록 출산은 안되고 외래진료만 가능한 산부인과가 10년 전에는 있었다한다. 그러나 그마저 없어진 지 오래다. 이곳 읍에는 고령층이 자주 찾는 진료과목인 정형외과, 내과 의원이 2-3개 있고, 다행히 치과, 안과가 하나씩 있다. 그러나 산모와 소아를 위한 전문의원은 없다.
작은 지역에 살다보면 넓은 도시에서보다는 선명히 보이는 문제가 있다. 인구문제가 그 중 하나다. 한국 사회 전체가 맞닥뜨린 문제이지만, 아직도 도시로의 인구 집중현상이 있어 인구문제는 도시에서는 피부로 느끼기 힘들다. 인구 감소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시작은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 중심의 국가 경제성장 계획 때문이었다. 이런 국가적 정책은 이농현상을 가져왔다. 또한 이 국가정책에는 산아제한 정책도 동반되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한명 낳기 운동’이 그 예다. 그런데 농촌 인구감소의 원인에는 전국적인 저출생 추세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도농간의 깊은 경제적· 문화적 격차 그리고 농업에 대한 저평가· 천시가 있다. 이런 복합적 원인으로 인해서 농촌은 고령화 위기라는 타이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조차 또래를 만나기 힘든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염창희(이민기)가 시골에서 친구 만들기에 대하여 투덜대는 장면이 나온다. “반경 10키로 이내에 또래를 모아도 열댓명이 안되는 곳에 살아있으니,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은 친구가 된다.” 그러면서 동생을 가리키며 “저 아이는 동네에 또래가 없어서 동네바보 어른이랑 놀았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학교에 가야 다양한 또래친구를 만난다. 짝이 맘에 안들면 다른 친구들과 놀면 된다”고 말한다. 드라마 속 경기도에는, 비록 동네 친구가 없으나, 학교에 가면 학급 친구가 있었고, 또래들과 친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지역, 현재는 어떤가? 서울의 주변권인 경기도가 아닌 지역은 시골로 가면 학교에서조차 자신과 같은 나이의 친구들을 만나기 힘든 곳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사는 지방의 학교 상황을 대략 보면, 면 단위에 고등학교는 폐교한 곳이 많다. 다행히 면마다 중학교는 있는데 그 규모가 줄어들어, 15-6명 정도로 폐교될 위기를 맞고 있는 곳이 많다. 초등학교 학생수도 전학년 십여명밖에 안되는 곳도 있다. 한 학년의 학생이 1명인 곳도 있다. 이런 곳은 복식학급이 운영된다. 2개 이상의 학년이 한 교실에서 운영이 된다. 어릴수록 1년이 큰 차이를 보이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같은 학년 친구없이 학교생활을 해야 한다. 작은 학교가 갖는 장점이 있을 수 있다. 큰 학교 학부모는, 아이들이 교사의 관심을 더 많이 받고, 학생의 학습능력, 개인적 취향에 따라 지도를 받으니 좋지 않겠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학교 학부모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또래활동을 통한 정서적 성장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고, 경쟁이 전무하니 학습의 성취욕구가 떨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가면 적응하기 힘들어진다고 걱정한다.
그리고 미취학 아동을 위한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부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있다. 어쨌든 국공립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이들은 방과후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봄이 이루어진다. 가정에서 아동돌봄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농사를 짓는 학부모라고 아이를 방과후 돌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해가 질 때까지 해야 하고, 바로 집 앞에 일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역아동센터는 대부분 민간 센터이고, 종교기관이 운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읍의 경우는 취학후 돌봄을 맡을 기관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민간이 운영한다해도 다양하여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작은 지역은 선택권이 없다.
며칠 전, 시골의 특징을 온전히 보여주는 한 면을 다녀왔다. 작은 학교를 품은 마을에서 빠지지 않는 건물은 면사무소와 지역복지관, 농협이 있고, 근거리에 학교와 교회 건물이 흩어져 있다. 이 건물들을 볼 때, 이 곳이 마을주민들의 생활 중심지임을 알 수 있었다. 지역복지관에는 작은 도서관과 마을회관 역할을 하는 강당 그리고 작은 모임이 가능한 방들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작은 카페도 없다. 커피를 먹기 위해서는 농협 앞 자판기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마을의 중심지에도 인적이 드물고, 황량하다. 그 곳에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은 아동들이 있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학교와 지역아동센터이다. 내가 방문한 아동센터는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교회 건물 바로 옆에 있다. 복지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곳에 교회라도 있어서 돌봄을 책임지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초등학교 학생들 전부는 방과후 학교와 가까운 지역아동센터로 이동하여 돌봄을 받는다.
모든 종교기관 부설 돌볼센터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곳 마을의 지역아동센터는 교회적 의식이 일상활동에 스며들고 있다. 일례로 식사 시간마다 기도를 해야 한다. 현재의 센터장이 변동없이 20년 이상을 운영책임을 맡고 있다. 교회와 센터장은 돌봄의 전권을 행사한다. 이에 대하여 불만인 학부모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불만을 표하기가 힘들다. 자신의 불만 표시로 인한 센터장과의 껄끄러운 관계가 바로 아이에게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가 갈 곳이 없어진다. 여기서 제시된 것은 하나의 예이다.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기관은 지자체이다. 보육시설에 대한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지자체의 세밀한 관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학부모들은 말한다.
농촌 어린이에게 맞는 정책과 지원을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 탄생 100주년이라 한다. 어린이날 특집행사가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일회적인 어린이 관련 소식이지만 이를 전하는 언론이 다루는 어린이들은 도시의 어린이들이다. 대부분 농촌, 산촌, 어촌의 어린이에 대한 관심은 없다. 정책과 지원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을 고려한 정책이 적다. 주요 정책지원의 대상인 취약층 어린이라는 범주에는 경제적 이유가 주요하다. 이런 범주는 도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지원이다. 시골의 어린이는 경제적 취약층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취약층이다. 도시에서 쉽게 눈에 띄는 학원간판도 찾을 수 없다. 학교의 수업을 보충하기 위한 학원뿐만 아니라, 취미 활동, 운동을 위한 시설과 교습소를 찾을 수 없다. 대중교통이 전무하므로 아이들이 읍으로 찾아가서 이런 문화적 기회를 접촉하기도 힘들다.
또한 시골의 어린이들은 또래그룹과의 접촉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절대적인 인구감소 영향이다. 농촌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소리는 이제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다. 어쩌면 어린이들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수 있다. 보육시설이 원아수 감소로 폐원 위기에 몰리고 있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런 우려 때문에 농촌실정에 맞는 소규모 어린이집을 지원하는 ‘공동아이돌봄센터’ 사업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곳을 통하여 벽지에도 찾아가는 다양한 문화 기회가 더 많이 늘어나길 기대해 본다.
아이들에게 종종 미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미래의 한국사회를 짊어질 어린이’, ‘미래의 일꾼’ 등이다. 그런데 현재 행복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건강한 미래의 어른을 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