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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Sep 14. 2022

누구를 위한 다문화주의인가?  

- 나부터 다문화사회의 주체가 되자. 

문화적 제노사이드    

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현지시간) 앨버타주 에드먼턴에 도착해 기숙학교 원주민 아동 학살 생존자의 손에 입 맞추고 있다.2022.07.25. ⓒ사진=뉴시스

7월 말, 프란치스코 교황이 캐나다 원주민에게 사과하는 뉴스를 봤다. 지난 100년 동안, 가톨릭 기숙사 학교가 원주민 자녀에게 행한 원주민 언어 사용 금지, 체벌 그리고 폭력에 의한 사망에 대한 사과였다. 가톨릭 기숙사 학교 운영은 백인들이 캐나다를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원주민을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어린아이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했다.      


교황은 이날 “원주민들을 기독교 사회로 강제 동화시킨 정책으로 그들의 문화가 파괴되고, 가족과 세대가 단절됐다”며 “기숙학교의 정책은 재앙적이었다”고 말했다.    

 

서구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은 자원 약탈만이 아니라, 제노사이드까지 가져왔다. 원주민을 인간이 아닌 야만인으로 취급하여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폭력은 백인을 향한 폭력과는 다르게 인식되었다. 그리고 노예화했다. 백인 지배정책은 그 후 조금 발전하여 원주민을 인간으로 인정을 하되, 그들에 대하여 백인문화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원주민의 모어와 문화를 말살하는 문화적 제노사이드였다.      


우리 역사에도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소학교를 다녔던 선친께서 들려주신 일화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했지만 아이들은 대화 중에 계속 조선말을 썼다. 어느 날 일본인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앞으로 조선말을 쓰다 걸리면 운동장 구석에서 큰 돌덩이를 들고 서 있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벌을 받게 되었는데 다른 아이가 잡혀 차례를 넘겨줄 때까지 울면서 계속 돌덩이를 들고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억압적 언어정책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겼을까.”  ( 한겨레신문,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한글날에 생각하는 문화와 생명, 2019.10.8)


공공장소에 일어난 문화적 폭력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런 문화적 폭력과 무관할까? 몇 년 전 나는 천안에서 제천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폭력 상황을 목격했다. 설연휴 기간이었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많지 않았다. 버스가 중간에 휴게소에서 정차했다. “빨리 갔다와.” 화장실 가기 위해 내리는 두 명의 승객에게 운전기사가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생김새가 한국인과 조금 달랐다. 그 친구들은 화장실에서 돌아왔고, 얼마 안 있어서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두 명의 외국인이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운행을 중지하고 이들에게로 왔다. “야, 너희들 조용히 안 해. 버스 안 예의도 몰라.” 버스 안에서 대화를 하는 것이 운행을 중지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나? 마주편 칸에 앉아있는 남성은 그보다 더 큰 소리로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제재가 없었다. 이건 명백히 이주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왜 외국인에게 야단이세요. 말도 못해요. 씨끄럽긴 뭐가 씨끄러워요. 그리고 왜 승객에게 반말이에요.” 다행히 난 봉변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가 도착지에 도착했다. 내가 주섬주섬 내리려 준비하는데 외국인 이주자 한 명이 내게 왔다.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 인사가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알고 있다. 낯선 언어가 더 크게 들린다는 것을. 이해가 불가한 소리는 단지 소음일뿐이다. 그런데 그 외국인이 백인이고 영어를 썼다면 운전기사와 나를 포함해서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들렸을까? 그 언어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언어와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차별하기 때문이다. 버스라는 공공장소에서 기사가 당당하게 반말로 승객을 대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인종에 대한 차별이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그것이 인종차별이며 폭력이라는 것을 모른다.         


난 정반대의 상황도 경험했다. 내가 홍콩에서 얼마간 살 때, 홍콩 재래시장을 갔었다. 상점에 가서 영어로 물건의 가격을 물었다. 그런데 대뜸 상인이 영어로 답했다. “광동어, 여기 살면 광동어를 말해야지”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호주에서 온 백인과 함께 시장에 갔었다. 백인은 상인들과 영어로 웃으며 대화를 했었다. 그 사건 이후로 다시는 재래시장을 안 갔다. 대신 말이 필요없는 수퍼마켓에 갔다. 공식언어에 영어가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광동어를 강요하는 시장 상인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국이나 홍콩이나 문화적 폭력이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발생하고 있다.      


해외에 살거나, 여행을 하면 체감하는 것이 소통 문제, 언어로 인한 불편이다. 단순히 불편을 넘어서 자존감을 훼손시킨다. 졸지에 바보가 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모어가 아닌 언어만 강요되는 장소에 상당기간 살아야 한다면, 언어의 문제는 불편을 넘어 생존의 문제로 변화한다.     

  

동화요구에서 상호이해로       

노무현 정부는 2016년 단일민족을 버리고, ‘다문화 다민족사회로’의 이행을 선언했다. 한국이 다문화사회를 선언한지 어느새 15년이 지났다. 그리고 다양한 다문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그런데 다문화 정책의 방향이 이주민에게 한국에로 적응을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일방적 동화에 맞추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얼마전 결혼이주민 여성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은 이주민이 온 고향 문화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어떤 가족들은 집이나 마을에서 이주여성이 모어를 쓰는 것을 금지시킨다. 이들이 이주자인 것을 숨기고 싶어한다. 결혼이주자가 한국어를 못하면 부적응자가 된다.  귀화를 할 때는 어느 가족은 모국의 성을 버리고, 한국식 성을 쓸 것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다문화하면 즉각 떠오르는 것이 국제결혼 이주자, 동남아 등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다. 다문화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들이 주류 문화에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다문화주의의 주체는 이주민 이전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다문화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의 문화를 성찰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여성가족부가 2021년부터 다문화교육을 의무화한다는 사업을 발표했다. 현재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다문화교육을 실천하는 곳이 있다. 특히 이주배경 인구가 많은 곳에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다문화수용 지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성인보다 청소년의 지수가 높았고, 일상에서 이주민을 자주 볼수록 다문화수용성이 높아지는 경향성이 있었다. 그리고 청소년은 다문화 교육에 참가한 청소년일수록 지수가 높게 나타났다.      


이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난 나와 다른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내 평상시 말이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에게 혹시 상처가 되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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