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본다는 것
모든 상품에서 가성비는 중요하다. 여행 상품에서 성능은 무엇일까? 아마도 여행에서 주요한 기준인 성능은 여행 목적이 될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자에 따라 다르고, 그 구체적인 목적은 여행 전 준비에서 결정된다. 여행에서 볼 것, 먹을 것, 쇼핑할 것 등 목록이 바로 여행의 구체적 목적이 된다. 그렇게 목록을 작성하는 것에서 여행은 시작되고, 목록을 현지에서 확인, 점검하는 것으로 여정은 채워진다. 이 여정은 주로 사진으로 기록된다. 목록과 사진이 여행의 가성비를 결정한다.
그런데 여행을 마친 후 여행객에게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경우는 목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몇몇 순간, 날 관통하는 알 수 없는 의식 자각이 있을 때가 있다. 해양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본 바다는, 내가 서있는 곳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날 놀라게 했다. 루스키 섬의 리조트에서 본 바다는 그림 같았다. 원래 여행목적은 루스키 섬에서 트래킹을 하는 것이었다. 쏟아진 폭우로 트래킹이 시작되는 목적지로 진입을 못하고, 다시 택시를 돌려야 했다. 트래킹 대신 루스키 섬의 리조트로 갔다.
바람이 거칠어 본래 여행 목적지는 근처도 못가고 돌아왔지만 리조트 호텔 야외 테라스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테라스에 앉기 전까지 날씨를 생각지도 않고 감행한 결과로 허비한 택시비와 시간이 아까워서 마음이 복잡했는데, 그런 마음을 무로 만들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리조트 안과 밖을 여유롭게 다니는 고양이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건 여행 목록에 없던 경험이었다. 만약 내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다시 방문한다면, 방문 목록에 이 곳을 집어넣을 것이다. 물론 그 때에도 비슷한 충만함을 줄 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등대 입구에서 바라보던 바다는 어떤가. 해양공원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리조트에서 바라보던 바다도 아니었다. 해양공원의 분주함만큼 해양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나뉘어져 있다. 바다가 쪼개진다. 리조트 호텔 앞의 바다, 정박되어 있는 요트와 선착장으로 연결된 바다는 내게는 근접하기 힘든 곳이었다. 화려한 요트만 허용될 바다였다. 내가 가까이 간다면 바다가 날 토해낼 것 같았다.
등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광활하고 거칠었다. 바다와 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바다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날 삼킬 것 같았다. 사방으로 날 에워싸고 있는 바다는 바람을 불러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다. 수평선이 가까이 손에 잡힐 듯 했다. 나는 바다의 유혹이 무서워 발을 움츠렸다. 바다는 루스키 섬의 바다, 해양공원의 바다와 달리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같이 섞이고 싶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는 평소에도 바다를 보고 싶은 열망이 유달리 강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이유는 해산물 음식도 정교회 등 이국적 풍경이 아니라 바로 바다를 보고 싶은 열망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가 바다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은 들어가야 산을 알 수 있다. 산으로 들어가면 산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한꺼번에 한순간에 산을 알기는 힘들다. 산은 있지만 산은 숨어있다. 내가 산 속에 있을 때 나는 그 속에서 보는 사방은 또 다른 사방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계속 가야 한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산을 알아간다.
바다는 한 곳에서 한 번에 모두 볼 수 있다. 수평선을 따라서 ‘여기서 저기까지로’ 바다는 눈에 전부 들어온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제로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일뿐이다. 내가 맨몸으로 바다를 직접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바다를 볼 수 있지만 그 속은 내가 경험할 수 없다. 처음부터 바다는 그렇게 바라보면서 익히는 것이고, 그 속을 경험하려 한다면 그건 다른 세계를 갈망하는 것이다.
바다는 산과 달리 뻥 뚫린 느낌을 준다. 수평선이 바다를 안아서 내 눈앞에 내 놓는다. 이렇게 넓은 것을 한 번에 내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마치 내 세상이라는 듯이 내 앞에 펼쳐있다. 퍼즐 같은, 미로 같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로 뚫린 것이 바다다. 미로의 벽을 뚫고 싶은 마음이 바다를 보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바다를 보면 나는 미로, 퍼즐이 한순간에 사라진 황홀을 느낀다. 그런데 수평선으로 막혀 있는 바다는 그것만 보여준다. 내 몸 전체가 기억하는 바다는 거의 없다. 그것이 더 유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