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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Oct 15. 2022

이순이라던데

육십이 되면 이순耳順이라고 한다. 귀가 순해진다니. 


공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앎의 단계를 15세에 지학부터, 이립, 지천명, 불혹, 이순, 종심의 순으로 말했다한다. 공자가 정말 이순, 종심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정진해야 할 목표일 수는 있겠다. 나에게는 감히 내 목표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지학의 나이에 지학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앎의 단계는 처음부터 나와 같은 범인과는 맞지 않다. 그러기에  범인이 그 단계를 자신의 나이와 단순히 연결하여 계획하거나 반성할 일이 아니며,  괜히 스스로 낙망할 필요는 없다. 이미 시작부터 같지 않기 때문에. 


어쨋든 육순은 귀가 순해지는 나이다. 왜 눈이 순해지지 않고 귀가 순해진다고 했을까? 이순이 아니라 목순이라 할 수도 있을 터인데. 나는 왜 귀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하는 점이 궁금하다. 특히 학문을 익힌다는 것은 대부분 눈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여런 추측을 해보았다. 그 당시 깨달음은 서책을 통한 학보다는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이치를 깨닫지 않았을까?  또한 눈은 감으면 세상과 일시나마 멀리할 수 있지만, 소리는 그러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는 세상의 이치에 가까이가는 상징적인 몸의 기관일 수 있겠다.


순해진다는 뜻은 무엇일까? 귀에 들어오면 모두 이치를 이해되니 순해진다?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 사사로움없이 순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두 해석은 서로 배치되지 않으며, 순함으로 통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육십이 되어서 타인에게 순해보일 수 있겠다싶다. 번잡한 세상살이로부터 멀리 하니 신경쓸 일, 귀에 거슬리는 것도 적어서 순해질 수 있다. 육십이 되기 전보다 사사롭지는 않아졌다. 그 사사로움은 따지는 것이다. 경쟁하고 평가하는 곳에서 멀리 있기 때문에 순하게 보일 수 있다. 감히 그 주변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사로움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또한 시간이 주는 삶에 대한 태도를 무시할 수 없다. 지난 시간은 성취만큼 중요한 것을 깨닫게 했다. 시간을 견디면서 얻은 것은 이제는 포기도 나쁜 결정이 아님을 알게 한다.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음을 인정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폭이 커진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저 흐르게 할 경우가 많다. 


또한 현재가 남은 생애의 최고 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의 나이에 대한 차별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향만 남아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내 남은 생에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순해진다. 무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육십이 되면 귀를 포함하여 신체가 순해지지 않는다. 느려지기는 하나 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애가 쌓이면서 순한 상태가 되지 않는다.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번잡해진다.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몸은 어긋나기도 한다. 자기 몸인데도 통제가 하기 힘들고, 그 변화에 걱정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예전과 같은 습관, 인식으로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다. 몸의 주인인 자신도 낯설고 놀랍다.  아니, 주인인가, 마음과는 다른 동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싶다.  


오늘도 쁘드득 몸이 소리를 내며 아침을 시작한다. 순해진다는 것은 이런 소리를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것이겠지. 그러면서 운동으로 정진해야겠지. 몸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부조화에 놀라는 마음도 순해지면 좋겠다. 호흡을 깊게 하면서 조금 다른 눈길로 세상을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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