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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Jan 19. 202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우리의 소원은 건강 

“올해 소원이 뭐예요?” 새해가 오면 주고받는 의례적인 질문이다. 보통사람들의 소원 목록에는 건강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건강을 위한 실천으로 다이어트, 운동, 금연, 금주 등을 다짐하는 사람도 많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격언이 당연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이는 당연할지 모른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유례없이 불안했던 해를 경험한 후, 새해에는 더욱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올해 소원이 뭐냐고 지인이 물었을 때, 난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건강이지. 그런데 그게 내 의지랑 무관해서···.” ‘이 말에는 내 개인적 경험이 배어 있다. 건강은 개인의 의지, 노력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도 내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픗이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무엇이 암을 발생시켰는지 이유를 알고자 했다. 내 담당의사의 답은 애매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 그 의사의 대답은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사회환경적 문제, 유전적 문제, 생활습관의 문제 등이 얽혀 있으며, 원인을 하나로 꼭 집어 말하기 힘들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 의사가 한두가지 이유를 답하면 그것에만 집착하는 환자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리뭉실 답을 했을 수도 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질병도 사회구조적 환경과 무관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의사에게 물은 것은 ‘나에게 무엇이 문제지요’라는 것이었다.      


재발되었을 때는 창피하고 초라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관리 잘못으로 재발되었다는 의식이 더 깊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과 주변에 미안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처음 발병 원인도 내게 있었고, 이번 재발도 나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식습관, 생활습관 등을 바꾸려 노력했는데 부족했던 것일까. 가족의 말대로 ‘나의 예민한 성질’ 때문에 재발했을까. 그런데 3차로 재발되었을 때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내 몸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 몸에 굴복했다. 몇 번의 재발 과정을 거치면서 몇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수술로 암덩어리를 제거하고, 방사선, 독한 항암제로 다스린 후에도 내 몸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약해진 면약체의 몸덩어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려는 개별적 의지의 밖에서 내 몸의 건강과 불건강이 결정된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질병은 모두 내 잘못 ?

항암치료가 끝나고, 머리카락이 자라서 겉으로 별 특이점이 없어도, 일상이 가능한 정도가 되어도 내가 암환자라는 의식은 계속된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병원 밖 생활에도 그렇다. 암환자가 된 이후부터 주변환경에 예민해졌다. 그것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유난’스러워 보이고,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세먼지에 대한 나의 민감성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체크하는 것 중 하나가 미세먼지 웹이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사태로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마스크를 썼다. 공기가 안 좋은 날에는 외출을 최대한 피했고, 실내에서는 공기 청정에 신경을 썼다. 도서관, 카페 등 공공장소에서 창문이 열려있으면 달려가서 닫았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며, 그렇게 몸을 걱정하면 집에 있지하며 못마땅해 할 수도 할 수도 있겠다.      


나도 남처럼 아무런 일도 아닌 듯 흉내를 내고 싶을 때도 있다. 내 몸의 상태를 숨기고 생활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기준이란 바로 건강한 사람들의 기준이다. 유질환자를 고려하지 않은 기준이다. 그들 기준대로 사는 것은 날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 환자예요라고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소연 같기도 하고, 타인에게 나를 밝힌 순간, 받게 되는 시선과 침묵이 부담스럽다. 또 잠시라도 병의 발병 이유와 회복법에 대해서 이렇게저렇게 오고갈 말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제일 힘든 것은 몸과 병을 내가 설명하는 것이다. 자신도 낯선 상태를 무경험자인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실 의사에게도 내 몸 상태를 설명하기 힘들 때가 많다. 오락가락하는 몸의 상태와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타인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에게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고민할 때도 있다. 특히 재발 때는 그랬다. 똑같은 이유로 주변에 걱정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점, 동정과 배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참혹했다.        


처음 암 투병중일 때는 투병기을 담은 책 몇 권을 읽었다. 대부분 성공적으로 병을 극복한 과정을 쓴 것이었다. 이 책들은 같은 질병 또는 비슷한 상태의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희망서이며, 이렇게 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지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투병기는 바뀐 삶의 태도를 언급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의 공통적 특징은 발병의 원인과 그 회복을 환자의 개인적 책임과 의지에 의존한다. 이런 의식은 사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환자들이 갖고 있는 ‘질병의 개인화’라는 프레임 안에 있다. 투병기는 발병 이전의 나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정신적 승리의 자세를 요구했고,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했다.    


건강권과 함께 아플 수 있는 권리를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다른 투병의 소리가 들린다. 조한진희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생소한 권리, 질병권을 주장한다. 저자는 건강권과 다른 질병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건강권이란 단어는 건강을 중심에 놓고, 건강을 위한 임시적 상태로 아픈 몸을 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질병권은 아플 권리를 주장하는 표현으로서, 치료받을 권리를 포함해 건강권과 유사한 의미가 있지만 강조점이 다르다. 아픈 몸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질병을 완전히 겪을 수 있도록 시간과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려 했다.” 저자는 질병을 개인화하고, 질병으로 인한 차별과 배제가 인정되는 사회, 건강제일의 사회, 건강강박의 사회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란 말은 건강강박사회를 단적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조한진희 작가를 필두로, 아픈 몸들의 경험을 가시화하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을 통하여 나와 다른 만성질환자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그리고 불안을 생생히 이해하게 되었다. 치료가 힘든 만성질환자들은, 병으로 인하여 직장, 학교 등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음으로써 가져올 미래의 불안, 가난에 대한 고통이 현재 질병의 고통보다 두렵다고 말한다. 건강약자들을 위한 사회제도와 환경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들의 용기 덕분에 나도 내 병을 드러내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새해에는 병에 걸리면 인생이 망했다는 의식이 차별과 편견의 말임을 아는 사회,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의 두려움 없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올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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