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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Nov 08. 2022

비혼의 이유




2021-02-02 12:18:38


아마도 내가 30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내가 구로지역에서 노동현장 활동가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 활동가가 나에게 말했다. 이름도 얼굴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말은 기억난다. "선배, 혼자 사려면 성공하셔야 돼요. 혼자 사는 사람의 모델이 되어야 해요. " 정말 심각한 표정이었다. 내 결혼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친구에게 비혼이라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고, 결혼이라는 심대한  인생의 매듭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결심이 마치 혁명적인 사고로 받아들였나보다. 그런데 나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이 사회적 의미가 아니라 내 개인적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배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부담감을 갖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 비혼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 없이 결혼하지 않은 자, 미혼으로 규정되었다. 미혼이든 비혼이든 그들은 결혼이라는 기본값을 떠나서 생각되지 않는다. 결혼과 동일한 범주, 무게를 가진 대칭개념도 아니다. 그 변두리에서 위치하는 주변값일 뿐이었다. 후배의 말대로 비혼은 보이지 않는 주변값이었으며, 보인다면 무언가 색다른 의미를 덧붙였다. 그 의미는 비혼자가 붙인 것이 아니었다. 


나의 결혼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았어야 할 나의 어머니는 조금 달랐다. 그 연배의 어른들과 달리 결혼을 꼭 해야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 이야길 들었다. 아마도 어머니 결혼생활이 만들어낸 생각일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내가 결혼에 별 의사를 보이지 않자, 결혼을 하지 않으려면 안정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노환으로 힘들어질 때 나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있는데, 너는 누가 돌보니? " 어머니의 생각은 현실적이었다. 딸이 비혼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뒷받침할 소득이 필요했고, 건강약자가 되었을 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 시각이 아닌 사회의 시각은 무척이나 추상적이면서 허구이다. 어는 범주에서나 소수자 개개인은 종종 소수자의 대표성을 요구받으며, 가지게 된다. 다수자 각각은 각각이 다수의 집단적 대표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혼과 비혼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이유와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 각각은 그런 이유와 의미를 가지고 결혼이라는 것을 결정하겠지만.  그런데 비혼자의 이유와 의미는 언제나 공개되길 원한다. "왜 결혼 안 하셨어요?" 공개되길 원하는 일반적 다수가  갖고 있는 비혼자에 대한 이미지는 극단적이다. 아주 독립적인 다른 말로 하면 화합하기 힘든 성격이나 극히 불쌍한 실패자로 소수자를 이미지화한다. 비혼자의 대답이 무엇인든, 비혼자는 두 가지 중 하나로 규정된다.  


"아마 넌 결혼했으면 이혼했을거야"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는 내가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또는 극히 개인적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런데 나도 이 말을 부정하기 힘들다. 오히려 결혼했다면 이혼하지 못했을 것 같다. 참을성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결혼한 사람들이 모두 잘 참고, 이타적이고, 사랑이 충만한 것은 아니다. 나와 큰 차이가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부부들은 서로에게 잘 참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극히 좋은 성격이 아님에도 말이다. 결혼을 통하여 성격과 품성이 바뀌는 것인가보다. 그런데 비혼도 세월 속에서 성격과 품성이 변화한다. 다만 그 목표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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