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 very Special Bern
그들을 기억한다.
절제된 화면 속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피었어야 할 연인은 시종일관 움츠리고 있었다.
눈빛도 손짓도 몸짓도 답답하리만치 절제된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절정의 순간, 을
역설적인 상황에서 치러내던 홍콩의 연인을 스크린으로 지켜보던 당시에는
영화에도, 장면장면에도 공감도가 낮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한국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나서
이영애를 이해할 수 없고, 영화도 재미없었다며 투덜대던 내게
평소 쓴소리 마다 않던 한 친구는 "넌 사랑을 몰라" 했었다.
'봄날은간다'를 먼저 이해하게 됐고,
'화양연화'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비로소 공감하게 된 것 같다.
그나마도 영화가 개봉했던 때로부터 이미 4-5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현실적으로 한 번, 그리고 감정이 진했지만 아프게 한 번 사랑한 뒤였었다.
스위스 베른을 찾았던 건,
여전히 '화양연화'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이었다.
겨우 열흘 출장에 스위스 7-8개 도시를 매일 아침 기차로 이동해가며 취재를 하고 돌아와선
1주일 내 40page짜리 커버 기사를 완성해야 했고,
그 뒤로도 몇 가지 테마를 더 찾아내 6page 분량의 후속 기사를 두어번은 더 써내야 했었다.
그저 정해진 시간 안에 무사히 취재하고 돌아가
무사히 마감까지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만 가득했던,
감정이 충분히 영글지 않았던 여행잡지 기자 눈에 비친 베른은...
낡아서 반질반질한 돌이 촘촘히 박힌 길 양옆으로
그만큼 낡은 붉은 지붕 건물들이 늘어선,
유럽의 흔한(하지만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넘치는) 구도시였고,
어떤 테마를 찾아야 할지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 발견한 얘깃거리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당시 취재했던, 그리고 잡지 지면을 통해 소개한 이야기를 일부 편집해 옮긴다.
(* 당시 촬영한 사진을 찾을 수 없어 공개된 이미지에 출처를 밝히고 사용합니다.)
누구에게든 특별히 인연이 닿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하는 그 무엇, 혹은 그 장소. 아르헨티나 태생의 체 게바라는 혁명의 주무대였던 쿠바와 더 밀접한 인물이 되었고, 독일 태생의 베토벤 역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더 많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스위스의 베른은 그의 인생이 화사하게 피어나던 시절의 배경이 되었다.
울퉁불퉁한 자갈돌이 촘촘하게 박혀 있고, 폭이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베른(Bern) 구시가는 온통 비에 젖어 있었다. 스위스 수도이지만 규모나 명성은 취리히가 그에 앞서고, 체르마트나 융프라우처럼 소문난 관광지도 아닌 베른은 고즈넉한 중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전형적인 유럽 구도시.
사전 정보와 예상대로라면 15세기 풍경을 연출하는 소담한 구시가를 에둘러 흘러내리는 물빛이 예쁜 마을이어야 했다. 하지만 낡은 황톳빛 건물과 붉은빛을 띠는 지붕, 그리고 파란 물빛이 어우러지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어야 할 베른에 하루 온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U자 모양의 굽을 만들며 흘러내리는 아레(Aare) 강을 가로질러 놓인 키르헨펠트 다리를 건너던 무렵, 잠시 하늘이 파래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비구름이 기세 좋게 몰려왔다. 1400년대 초에 일어난 대화재 이후 그린 샌드 스톤으로 재건축된 베른 구시가 일대는 계속되는 비에 젖어 우중충한 빛을 더해갈 따름이었다.
중세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베른은 그 덕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도심 광장에 우뚝 솟은 16세기 시계탑, 베른을 상징하는 곰 등이 상징적인 장면이지만, 구시가 지하에 빼곡하게 자리잡은 아케이드나 울퉁불퉁한 돌길 위를 씽씽이 타고 달릴 수 있는 즐거움 등은 아직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테다.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킨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베른의 접점 역시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같이 아름다운, 인생의 행복한 한 때
누구라도 한번쯤은, 과학책을 넘기다 흘려 봤을 그의 이미지는 명료하다. 하얗게 샌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휘날리고, 날카로운 눈매에 차가운 눈빛이 번쩍이기는커녕 마냥 인상 좋아 보이는 노신사의 모습. 하지만 아직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전, ‘천재 과학자’라는 거창한 수식어 없이 평범한 청년으로의 삶을 살던 시절을 베른은 기억한다.
여기서 메인 등장인물은 당연히 둘이다.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의 첫 아내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3.14~1955.4.18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ć : 1875.12.19~1948.8.4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사랑의 여인과 결혼해 달콤한 신혼생활을 시작하며 남자로서의 행복을 만끽하는 한 때를 보냈고,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던 평범한 직장인의 신분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며 비로소 한 과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던 그의 화양연화를 이곳 베른에서 맞았다.
한 사람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전 세계 과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명망 있는 과학자로서의 시간을 맞았던 아인슈타인의 화양연화는 베른이 무대가 된다.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유태인 청년이 4살 연상의 첫사랑, 밀레바 마리치를 만나게 된 것은 취리히 소재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서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내 세르비아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 역시 먼 길을 돌아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영특함을 인정받아 남자 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하이델베르크로 유학을 떠났고, 공교롭게도 아인슈타인과 같은 해에 취리히로 가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서 그를 만났다.
나란히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둘은 자연스레 사랑에 빠졌지만, 둘의 연애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신체 장애가 있었다.
여자답지 '않게' 공부를 잘 했고, 심지어 유대인도 아니었다.
이 네 가지 팩트 중 가장 큰 걸림돌은 뭐였을까?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도 기꺼이 무릅쓸 만큼 사랑했던 젊은 연인은 베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고, 특허청의 평범한 검사관이었던 아인슈타인은 거의 혼자 힘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면서도 상대성 이론을 비롯해 아인슈타인의 주업적이자 세기적 논문으로 꼽히는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 역시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MBC TV <서프라이즈>에서 '아인슈타인의 두 얼굴'이라는 타이틀로 이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어요. 아인슈타인을 능가하는 수재였던 부인이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나중에 배신당했다는 내용이었다고 하는데... 막상 방송을 보지 못해 아쉽네요.
아인슈타인의 지난 삶을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 박물관
아인슈타인을 찾으려면 우선 구시가를 벗어나야 한다.
베른에서 가장 긴 다리라는 키르헨펠트 다리를 건너 구시가를 벗어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역사박물관 2층에서 비로소 그의 삶의 궤적과 마주하게 된다.
구시가에 그가 살던 집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 박물관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과정에 해당하는 그의 흔적을 담은 갖가지 물품들과 영상자료 등을 보관하고 있다.
전시는 과학자, 건축가,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태인에 대한 자료를 통해 독일에서 나고 유럽 각국을 거쳐 생활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아인슈타인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배경설명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 병무 기록표, 대학 시절에 제출한 과제물과 성적표, 첫사랑이자 첫 부인과 주고받은 연애편지, 친필로 쓰인 연구 논문의 원본 등 다양한 사진과 자료로 보여주는 삶의 발자취가 상세하다 싶을 만치 전시되어 있다.
이때 연애편지를 통해 밝혀진 게 여러가지가 있는데, 둘은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지적인 수준이 통했고, 결혼하기 전 양가의 반대에 휩싸였던 시기에 어렵게 가졌던 첫아이를 잃었다는 것 등 한 개인으로서 아인슈타인의 삶에 대한 궤적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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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인슈타인이 베른에 머문 기간을 계산하면 스위스 특허청에 하급 검사관으로 취직한 1902년부터 취리히대학 교수직에 임용되어 이 도시를 떠났던 1909년까지이니 8년 남짓이다. 그리고 첫부인 밀레바와 이혼하는 시기가 1914년이니, 그래도 그들의 사랑이 공고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점이었다.
그의 76년 인생에 견주자면 10분의 1이 채 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한 남자로서, 그리고 세상 누구라도 알 만한 과학자로서 그의 인생이 이 기간에 시작되었기에 베른은 더욱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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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00년도 더 지난 옛날에 그는 고풍스럽고 구불구불한 베른의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취재를 위해 베른을 찾았던 그 때도, 눈 대신 비가 내리던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 서서 청년이었던 시절의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그려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세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한 아레 강과 강변의 집들, 폭이 좁은 골목길, 들쭉날쭉 요철이 느껴지는 자갈이 깔린 길바닥은 젊은 시절의 천재 과학자가 걸었던 그 길에서 얼마나 달라졌을까. 말쑥한 외관의 트램과 트렌드에 따라 진화해왔을 사람들의 옷차림 말고 다른 건?
중세의 풍경이 여지껏 이어지는 걸 보면, 베른은 고작 100년 새 변화를 기대하기가 무색하리만치 아인슈타인이 살아왔을 그 날들의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베른에서 8년의 시간이 흐르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07년 전이던 1909년.
아인슈타인이 취리히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며 부부는 베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어쩌면 당연하게 어쩌면 우연하게, 행복했던 결혼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일며 그들의 화양연화가 흔들리는 것도 베른에서의 삶을 마감하면서 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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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을 떠난 10년 후, 둘은 결국 이혼에 이른다.
행복한 신혼생활과 과학자로서 명망이 바톤 터치라도 하듯 삶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베른 이후의 삶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세계가 아는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고, 나치의 압박이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비하인드 스토리지만, 아내와 이혼한 직후에 조카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3년 후 노벨상 수상 상금으로 받은 돈은 첫 아내에게 위자료로 건넸다고 한다.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상대성이론이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밀레바의 행적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은 위자료를 몽땅 아내에게 건넨 이유를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로 들고 있다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하는데 베른 취재 이후 아인슈타인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물리학의 대가’ 정도로 그를 기억하면 좋았을 텐데, 인간으로서의 삶의 흔적까지 모두 알아버린 지금은 화양연화 뒤에 찾아오는 그 이면의 모습에, 사랑이 끝나고 난 뒤 헛웃음 짓게 되는 허망함 만큼이나 입안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