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생산하는 사람
로스팅 교육을 준비하며 자료를 뒤적였다.
논문을 찾고, 해외 영상을 보고, 번역된 매뉴얼을 읽었다.
머리는 점점 채워졌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조언을 얻고 싶어 한 로스터를 만나러 갔다.
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도착한 작업실은 작았지만 단단했다.
공간은 아담했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그 안에는 몇 개의 그래프와 오래 쌓인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래프를 펼쳐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로스팅을 다양한 센서로 체크하는 과정에서
나는 알고 있었지만 쓰지 않던 데이터가 있었다.
그는 그 값 하나로만 조작한다고 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왜 그 데이터를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여 보지 않았을까.
왜 스스로 증명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그가 말하는 순간
비로소 “아, 이게 맞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까.
예전에 최진석 교수의 강연을 본 적이 있다.
‘나로 사는 법’이라는 제목이었다.
남의 기준으로 살지 말고,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라는 말.
그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기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식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되자고.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커피는 서양에서 온 문화다.
우리는 미국, 호주, 영국에서 만들어진 기준을 배운다.
대표적으로 Specialty Coffee Association 의 교육 과정처럼
체계화된 시스템을 익히고 자격을 취득한다.
그건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교육 과정이라고 하면
일단 한 번 의심부터 한다.
‘검증됐나?’
‘해외 기준이랑 맞나?’
정서도, 환경도, 소비 문화도 다른데
우리는 늘 외부의 판례를 들여와 판단하려 한다.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일은 뒤로 미룬다.
점점 공부하다 보면
한글로 된 자료가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결국 영어 논문을 찾게 된다.
그 과정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대부분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자료를 모으고,
좋다는 방식들을 모아
여기저기서 배운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
그럴듯하게 포장한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이 방식이 좋다더라.’
‘이 수치가 표준이다.’
‘이 프로파일이 트렌드다.’
내가 맞다고 증명한 적은 거의 없었다.
책으로 배운다.
영상으로 배운다.
남의 경험으로 배운다.
그래서 나는 이제
활동으로 배우고 싶다.
조모임, 동아리, 토론.
직접 부딪히고,
내 방식으로 실패해보고,
그 실패를 통해 기준을 만들고 싶다.
그날 작업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기준이 있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남의 말을 잘 외운 사람도 아니다.
자기 데이터를 끝까지 밀어붙여 본 사람.
자기 판단을 몇 번이고 검증해 본 사람.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
이제는 따라 하는 걸 멈추고 싶다.
내 기준으로 만든 커피를 팔아보고 싶다.
조금 느려도 좋다.
이번에는 내가 증명한 값으로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