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이어리

30' 갓 생 두번째 이야기

by 코스모스처럼

아버지의 죽음


“아빠, 아..아니..아버지”

막내딸의 첫 딸, 아빠가 안았던 마지막 손녀의 돌잔치를 앞두고 지방에 있는 언니들과 아버지와 엄마가 서울로 오셨다. 어떻게 돌잔치가 지나갔는지 생각나지 않을 만큼 돌‘잔치’보다는 조카 돌을 핑계로 삼은 돌‘여행’ 패키지였다. 고속 터미널, 서울숲, 서울랜드 그리고 서울 대공원.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마다 묻는다.

“과천에 있으면 과천랜드 아니야?” 내겐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아도 될 도돌이 질문일 뿐이다.

“선생님 여기 보세요, 이 숫자는 무엇인가요?”

“삼”

“여기에 8시를 그려주세요. 정확하게”

“...”

“선생님 큰 따님 자녀분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뭐라고? 지금 그걸 나한테 질문이라고 하쇼?”

아빠는 잔뜩 화가 난 걸음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병원을 나오셨다고 했다. 병명은 알츠하이머. 아빠의 뇌세포가 외부에서 지속된 스트레스에 의해서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대학원을 두 번이나 하고 시대적으로는 많은 것을 배웠던 아버지가 자신이 점점 바보로 느껴지는 순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곱씹어 돌이켜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온다.

결혼식을 하고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내가 결혼한 그 K군의 가족이 삼대이고 그는 장손이며 사촌 시누이가 여럿 있음도 천천히 알아가고 있었다. 어른한테 잘하는 게 복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나로서는 어머님 아버님의 부모님, 즉 양가 증조부모님들께 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혼 생활의 과제였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드리고 한 달에 한 번은 찾아뵈려 노력했다. 무릎이 아프셔서 한의원도 모시고 가고 비가 오는 날은 “할머니 저희 국수 먹으러 가요”하고 전화를 먼저 드리고는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옥수동 언덕길을 넘어 홀로 계신 시댁 증조할머니네를 찾아갔다. 누가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절반, 그렇게 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이 보태지곤 했다. 그런 나에게 신혼 생활은 곧 시댁 섬기기 생활이기도 했기에 신혼의 내 삶이 그리 즐거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참 고마웠던 건 아픈 아버지와 우리 엄마를 자주 초대해서 집에 편히 계실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이었다. 특히 돌 여행 주간엔 두 명, 세 명씩 낳은 아들딸들을 데리고 올라온 언니네 식구들을 거실과 작은 방에서 재우고 먹이면서 8월의 한여름 더위를 같이 보내는 중이었다.

“진아, 너 대체 어쩌려고 그래? 니가 진짜 아버지 모실 거야?”

4호선 서울 대공원역에서 무언가 언짢으셨거나 무더위에 손자 손녀 무리를 따라다니며 그림자 역할을 하는 게 지치셨거나 아무튼 아버지는 대공원역 플랫폼 노란 선을 아슬아슬하게 밟으시면서 잔뜩 역정을 내고 계셨다. “집에 가자. 집에 좀 가자 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러셨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8월의 한여름 더위가 좀 맵지 아니한가. 육십이 넘는 연세에 당뇨에 알츠하이머로 야위어진 아버지가 이해되는 무더위가 정점을 찍는 늦은 오후였다. 사람들 많은 데서 왜 저려냐는 눈빛으로 두 눈을 무섭게 뜨고선 아버지 쪽을 한 번, 내 면전을 한 번, 돌아가면서 째려 보던 둘째 언니가 말했다. “그냥 요양병원 보내자는데 왜 니 혼자 고집을 부리노?”

참 매섭고도 서운한 그래서 어떤 대답도 꺼내기 싫은 순간에 마침 지하철이 들어왔다.

“아버지”

잔뜩 짜증이 나서 벨트에 손을 의지하고 서 계시는 아버지의 팔짱을 붙들고 지하철 자리를 겨우 얻어서 앉혀드렸다. 내 새끼 따라다니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내 새끼의 새끼 따라다니기가 좀 힘들었을까. 나는 맞은 편 유리창에 비치는 희멀거니 풀어진 아버지의 눈이 안쓰럽고 귀했다.


똑.똑.똑.

일주일간의 긴 잔치를 마치고 언니들과 손님들이 지나간 시간이 아기에게 힘들었는지 딸아이는 돌잔칫날 오후부터 장염이 시작되었다. 갓 돌이 지나 식당 테이블을 잡고 걸어 다니며 이것저것 먹어보고 만져 보고 싶어 하는 딸에게 먹이기에는 안전하지 않은 메뉴였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오리 구이집이 새로 생긴 걸 발견한 날부터 꼭 올 거라고 다짐했던 식당이었다. 조금 늦은 점심. 규칙적인 식사를 하시는 아버지에게 조금 늦은 점심이라 마음이 급했던 딸의 마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듯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뜬 아버지가 십여분 동안 돌아오지 않으셨다. 걱정되는 걸음으로 남녀공용 화장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나지 않는 문이 잠겨있지 않아서 다행히 스르륵 열렸을 때 아버지는 무더위에 늘어난 용수철처럼 탄력을 잃은 뇌세포 줄기를 드러내듯 희멀거니 문 쪽을 바라보시면서 바지를 내리고 앉아 계셨다.

“ ”

무슨 말을 담아내야 할지 결정할 틈도 없이 아버지를 도와 바지를 입혀드리고 아직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고기판 앞에 앉혀드렸다. 늘어난 용수철이 제자리를 찾듯, 오래된 스위치가 눌러도 잘 켜지지 않다가 의도하지 않았을 때 툭 들어와 켜지듯, 자리에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멋쩍은 듯 나를 바라보시고는 이내 크게 즐겨지지 않는 입맛을 보이시며 몇 숟가락을 더 드셨다. 고맙다.

잃어버려지는 기억은 환자 본인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다. 옆에서 수발하며 아슬아슬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에게는 그날 하루가 무거우면서도 또 다음 하루를 기약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망각 지우개로 고단했던 하루를 금방 지워버리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맛있는 오리고기를 대접하면서 “아 맛있다 여기”하는 아빠의 젊은 시절, 나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새로 생긴 식당은 꼭 데리고 가서는 내게 맛있게 먹으라는 말 대신 본인의 탄성으로 자녀의 입맛을 돋우어 주시던 그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오후가 그렇게 망각 속에 지나고 다음 날 새벽이었다.

“아빠, 아..아니..아버지”

잠결에 깬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쓰레기통을 찾아 거실에 나왔을 때 아버지와 엄마가 주무시는 작은 방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안 주무시는 건가.’ 스스륵 방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는 벽과 벽이 만나 두 모서리가 겹쳐지는 모퉁이에 서서 소변을 보고 계셨다. “아빠..”

마음속에서 애틋함을 담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빠가 소망한 듯 짧게 튀어나왔을 때도 아버지는 늘어난 용수철처럼 자신의 뇌세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눈빛을 하고 계셨다. 아니 그때는 딱 아빠의 눈빛이 꺼지는 순간, 아무리 켜려 해도 오래된 스위치 뚜껑만 덜컹거릴 뿐 접지가 되지 않는 어둠 속에 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인 것만 같았다. 황급한 손으로 다시 아버지의 바지를 올려드리는 내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잠이 깬 엄마의 손을 붙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엄마..엄마...흐흐흑...”

남들이 부러워하는 딸이 여럿이라서 이집 저집에서 부를 때마다 짤막한 여행을 다니며 손가방 가득 아버지의 혹시 모를 옷가지들을 들고 2년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힘들었을 엄마가 애달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엄마 미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를 이렇게 고생시키고 있었네. 언니들 말대로 아버지를 이제는 요양병원으로 보내야 될 것 같아. 엄마가 너무 힘들잖아.”

엄마는 그 순간에도 아빠가 저질러 놓은 자리를 닦을 마땅한 걸레가 어디에 있을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괜찮다 괜찮아’ 당연하고 익숙한 듯 그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몇 번이나 상상하면서 준비했을 순간이었기에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 있도록 꼭 부여잡을 수 있으셨는지도 모른다. 다가올 나쁜 상황을 모르는 게 좋은지 알고 미리 걱정하는 게 좋은지를 묻는다면 나도 이제는 미리 대비하고 부여잡을 힘을 길러두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내가 우리 엄마에게서 발견한 지혜였으니까. 다음 날 오전, 엄마는 아버지의 팔짱을 꼭 부여잡고선 큰 언니가 있는 지방의 병원으로 바로 가는 기차를 타셨다. 그날 나에게 푸른 하늘이란 분명 한 번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잿빛 구름 하늘에서 내리는 폭포수를 두 뺨으로 받아 휴지로 닦아 내면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눈물의 배웅을 했다. “아기 장염 잘 치료 해라. 항상 너부터 챙기고. 애 때문에 너무 마음 끓이지 말고.” 시댁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를 챙기는 친정엄마의 걱정은 따뜻했지만 서글픈 내게 건네는 당신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나는 괜찮다. 내 걱정 하지 말고’ 뭐 그런 마음을 담은 작별 인사였다.


“아버지..아버지...흐흐흑...”

내가 세 번째 큰 소리로 아버지 이름을 불렀을 땐 그리도 애달프던 아버지와 이제는 마지막 이별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2년을 꼬박 요양병원에서 지내며 그래도 가까이 사는 자식들이 자주 아버지를 살폈었다. 주말 근무를 마친 사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병원에 모이는 오후에는 아빠의 굳은 몸을 누인 침대를 목욕실로 옮겨 유독 땀이 많은 아빠의 몸에 욕창이라도 생기지 않을지 매주 살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모두 여름이었던가. 그해 여름도 참 더웠다. 그래도 여름 휴가는 온전히 가족과 함께해야 할 시간. 언니네 식구들이 제각기 여름휴가를 떠나던 여름에 나는 아빠 병원 근처에 사는 언니네 집에서 함께 아이들을 놀리며 방콕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아빠가 마지막으로 안고 좋아했던 막내딸 딸, 손녀는 네 살이 되어 잘 먹고 잘 자라고 있었다. 그 딸을 키우는 엄마는 젊은 엄마, 아빠의 임종을 며칠 앞둔 내 나이는 한국 나이 서른하나, 미국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폐혈증이래” 한 달 전에 폐렴을 하신 뒤로는 곧잘 증세가 나빠지고 있다고 말하는 엄마가 알고 있는 아빠의 병명은 패혈증이 아니라 폐혈증이었다. 옳고 그른 표기가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아빠는 가빠지는 호흡의 안정을 위해 산소 마스크를 하고는 39도를 오르락 거리는 열을 잡기 위해 링거를 두 개씩 달고선 생애 시간을 버텨내고 계셨다. 완전한 휴가를 마치기도 전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식구들이 아빠 병원 근처 언니 집으로 모두 모였다.

“오늘 밤은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아빠의 고열과 가쁜 호흡은 밤이 되면 증세가 심해지고 낮이 되면 안정을 되찾기를 반복했다. 밤마다 순번을 정해 아빠 곁은 지키던 형부들은 묵혀둔 휴가지 빨래와 돌아보아야 할 일들을 위해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도 올라가야 되는데. 지니 어떻게 할래?” 남편이 내게 묻지 않았다면 나도 당연한 듯 서울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응. 나는 여기 일주일 더 있을 테니 다음 주말에 데리러 내려오세요.” 나는 그냥 언니 집에 남기를 택했다. 그 상황을 돌이킬 때마다 내가 깨닫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임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의 내 결정이 천운이었음을. 결국 효도할 수 있었던 시간 들도 내게 다가온 행운의 순간들이었다.

그날 오후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호흡이 편안하게 잦아드는 점심때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나는 딸아이 손을 하나씩 잡고는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나와 엄마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로 무더위 해장을 할 참이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에 뒤쫓는 소리를 내며 주치의 선생님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곧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이요? 오늘이요?”

나의 당황스러운 되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아버지의 병상을 찾아야 했다. 지난 2년간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시간을 내어 아빠를 뵈러 왔을 때 아빠는 한 번도 스위치가 켜진 눈빛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남의 집 화장실도 잘 쓰지 못할 만큼 비위가 약한 엄마가 언니네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 아버지 곁에서 환자식을 떠먹이고 그 숟가락으로 점심, 저녁을 함께 해결하는 2년 동안 아버지는 곁에 계신 엄마에게도 어떤 말을 건네지 못하셨다.

“날 두고 진짜로 가려고 그래요? 아픈 나를 먼저 보내면서 내 관은 유리로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근데 이게 무슨 일이야. 왜 당신이 먼저 가려고 그래? 흐흐흑...”

엄마가 한 맺힌 울음을 쏟아내었을 때 아빠의 덮인 눈꺼풀 사이에서 눈물이 흘렀다. 주르륵.

켜지지 않는 눈빛처럼 조여지지 않는 눈물관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인사를 마주 대해 주셨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언니는 아버지 곁에 다가가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신호에 답을 보내며 인간으로서 죽음 전에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의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아니 아빠. 내 마지막 인사는 미처 뱉어내지 못하는 머뭇거림이었다. 아직 만 나이로 서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난생처음 맞닥뜨려야 하는 임종, 그것도 내 아버지의 죽음. 그것이 무섭고 떨려왔다. 아버지 눈에서 2년간 고였던 눈물이 흐르고 무엇으로든 서로 간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은 야속하게도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초록색 화면에 선명하게 이어지는 흰색 선. 그리고 신호음과 함께 숫자 0. 너무 딱딱하다 못해 무섭고 그래서 늘 쉽게 대화하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작별도 우리가 나눴던 여느 대화의 순간처럼 비슷하게 끝이났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떼기 전에 내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듯이 짧고도 긴 사랑의 대화도 없이 아버지와 작별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사랑했던 마지막 손녀. 만으로 아직 세 살을 채우지 못한 그 어린 아기는 얼마나 무섭고 낯설게 할아버지 발 곁에 머물고 있었을까. 내 딸의 낯선 눈동자를 돌볼 겨를도 없었던 어린 엄마였다. ‘아빠, 죄송해요. 당신은 막내만큼은 애교 있게 아빠를 부르고 자주 다가왔으면 좋으련만. 당신의 엄격한 훈육과 보수적인 가르침이 딸들과 멀어지게 했다며 친구들에게 뒤늦은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다지요. 당신의 아쉬운 눈빛을 받던 무뚝뚝한 막내딸은 겨우 밥상에서 수저 한 벌 당신 앞에 먼저 가져다드리는 표현으로만 당신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을 뿐이었네요. 입관식에서 다시 젊은 날의 모습을 한 듯 누워계셨던 평온한 당신의 미소를 마주했을 때 나는 그제야 늦은 좌절과 후회를 느꼈습니다. 여행을 다녀올 때면 항상 기념품과 현지 간식을 두 손 가득 들고 돌아오던 당신의 정감 있던 모습. 마시멜로며 파인애플이며 육포며 땅콩이며 마음껏 먹도록 펼쳐두고는 방안에 틀어박힌 딸들이 뛰쳐 나와 함께 즐겨주기를 얼마나 바라셨을지를. 이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천국에서 당신을 마주했을 때, 그때는 후회가 없는 마음으로 마음껏 표현할께요. 고맙다고 당신은 나의 멋진 아버지 아니 다정하게 불러보고픈 아빠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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