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갓 생
화성남 금성녀
서울에서 2시간이 넘게 걸려 바람 부는 오이도에 도착하고는 난생처음 조개구이의 쓴맛을 느낀 그 날도 우리는 햇볕 잘 드는 창가에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었었다. 신촌 카페에서 대학로 민들레 영토에서 오이도 바닷가에서. 그가 좋아하는 내 오른쪽 옆모습이 찍힌 사진들 속에서 자주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그 책을 추억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 나지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함께한 결혼 기간 동안 어쩌면 신혼 초부터 서로에게 느낀 감정이 그 책의 제목 그대로였다는 것, 서로의 다름을 느낄 때마다 나는 그 책을 함께 읽었던 어렴풋한 시간과 어리숙함을 다시 떠올려보곤 했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5가지 사랑의 언어>만 보아도 서로의 다름은 충분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화성남이 원하는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이었던 반면 금성녀인 나는 ‘함께 하는 시간’이 사랑의 표현 언어라 여겼다. 화성남의 인정하는 말의 하위 범주 안에는 존경과 배려를 함께 필요로 했는데, 그것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배려였다. 소위 남자의 동굴의 시간.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느끼는 금성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배려하고 싶었다. “나 새벽 3시까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 “ ? ” 무슨 말일까 아니 무슨 마음이었을까. 돌이켜보아도 참 긴 시간이었던 그의 필요를 배려한 것은 첫 아이를 임신한 겨울부터였다. “우리, 아이는 3년 정도 후에 갖는 거 어때? ” 임신을 서두르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신부를 아끼는 마음이었을거라고 이해하고 싶었던 화성남의 제안. 그러나 장손과 장남의 자녀를 빨리 보기 원하셨던 조부모님과 시부모님의 마음을 나는 또 헤아려야 했다. 너무 어린 신부였는지 출산도 참 빨랐다. 38주를 채운 아기는 2시간의 진통 끝에 세상에 나왔다. 두 눈에 별을 하나씩 담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우리의 첫 딸. 외풍이 심했던 신혼집에서 방이 3개나 되는 넓직한 재개발촌 빌라로 이사를 했을 때부터 화성남은 자신만의 행성을 꾸밀 방 한 칸을 원했다. 아주 넓진 않아도 딱 홀로 머물 수 있는 화성, 그만의 동굴. 가끔 빨래를 가지러 지나가는 길에 그의 행성을 구경할 때면 책상 앞에 붙여둔 그만의 버킷리스트를 볼 수 있었다. 30대에 이루고 싶은 세 가지 꿈. 돌이켜보아도 참 부러운 그의 30대였다. 결혼을 하고도 온전히 홀로 일 수있었던 그가 새삼 돌이킬 때마다 부러워 속이 아파온다. “자기 남편은 참 대단하다. 우리 남편은 도통 자기 계발이라고는 안해. 무슨 남자가 수다만 그렇게 많은지 맞장구쳐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니까아.” 윗집 언니가 (내 입장에서) 배부른 소리를 할 때마다 “금성녀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아시나요?”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밖으로 보이는 화성남의 모습이 워낙에 다정해 보이고 인상이 좋은 사람이어서 나만 괜시리 남편 트집이나 잡는녀로 보일 게 뻔했다. “네네네. 혼자 자서 참 편합니다” 빨리 마무리 맞장구를 치는 게 아줌마 관계를 더 매끄럽게 해줄 때가 많다. 속이 곪는 게 차라리 낫다.
새근새근 잘 자고 잘 먹고 잘 노는 천사였지만, 외풍이 심했던 신혼집에서 첫 겨울을 나며 어른도 맡기가 힘들었던 외벽 곰팡이 냄새를 머금고 자란 것이 기관지 약함의 원인이 되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아기는 첫 돌부터 세 돌까지 무려 열 번의 폐렴을 앓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다녀야 했던 병원과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 39도까지 올라서 매번 경련을 일으키는 아기를 물수건으로 닦으며 얼음 같은 발바닥을 주무리면서 천사같은 아기를 살려달라고 울던 365일의 밤을 참 오랫동안 여러 해의 쳇바퀴를 돌며 홀로 지새웠다. 그가 있는 화성은 어떤 곳일까? 아픈 아이를 안고 어쩔줄 몰라하며 방문을 여러 번 드나들 때도 새벽 3시까지 그의 방은 오롯이 화성의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첫 아이를 키우는 것도 서툴고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시댁이었다. “할머니가 너 앞으로 계속 딸만 낳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신다.” 조선시대물에서 본 적이 있는 아들 타령을 늘어놓으시면서 뒷 손을 뻗어 아니다 (그만 뒷주머니가 생각나서) 손을 뒤로 뻗어 아들을 데리고 나가시던 산후조리원 방문하신 날, 나는 밤새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다음날 내 생일을 맞아야 했다. 다행히도 첫 손녀는 너무나 예뻐라 하셨지만, 비밀에 뭍기로 한 그 시집살이 보따리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날이 참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움파룸파처럼 작아진 몸으로 엄마 뒷주머니에 폭 숨어 아무 말도 아무 위로도 아무 대변도 해주질 않았다. 금성녀는 그게 새벽 3시까지 굳게 닫힌 화성 동굴문을 바라보는 것만큼 시리고 외로웠다. 30대의 갓 생은 사실 예쁜 포장을 위해 앞의 세 글자를 빼버렸다. 원본 원문에는 ‘오마이’가 들어가는데 이는 중의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오마이갓 생 혹은 오 마이 갓 생.
어린 신부는 어떻게 그 외로운 시간을 금성에서 홀로 살아냈을까. 돌이켜보아도 정말 갓 생이다.
아이가 두 돌이 될 무렵부터 2년 동안 화성남의 배려 덕분에 매주 불금 저녁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래 나도 혼자 좀 있어 보자.’
그렇게 마음먹고는 캄캄한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 택시를 타고 근처 금요 심야 예배를 찾았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유인즉 또, 그때 목사님의 설교가 무엇이었는지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들어가는 입구 문을 열 때부터 택시를 타고 돌아와 화성남 금성녀가 함께 산다는 집 대문을 열 때까지 계속 울었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이 나의 이해 할 수 없음으로 가득 찼던 외로움들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토닥였다는 기억뿐이다. 자기 계발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윗집 언니는 카페에 가면 항상 남편과 옆자리에 앉았다. 유명한 베스트셀러나 패드 따위를 왜? 그냥 깔깔거리고 어깨를 툭툭 치다가 돌아왔을 게 뻔했다. 반면, 화성남 금성녀는 되지 말자고 손가락을 걸고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인증샷을 찍고선 시작한 결혼 생활 동안 그들은 늘 마주 보고 앉았다.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 우리는 늘 마주 보고 앉으니 그것부터가 틀렸다. 그의 앞에는 나의 입술과 턱 중간쯤까지는 가릴 수 있는 열린 노트북이 있었고 나의 옆자리에는 예쁜 미소 가득한 딸과 딸이 잠든 틈을 타서 내 마음을 읽어 줄 시집이 한 권 있었다. 시집이 대신 말해 주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