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이어리

20' 뒤죽박죽 네번째 이야기

by 코스모스처럼

상경 (서울 팀장님은 시골 쥐)


“한강 참 좋다.”

10월의 가을 향기를 가득 묻힌 바람이 불어왔다. 어릴 적 동네 어르신이 태워주시던 문어잡이 배 말고는 아마도 유람선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한강 유람선. Seoul이다.

9개월간의 잡지사 기자 생활은 충분히 즐거운 바람이었다. 급작스럽게 지사가 없어지고 부산과 서울에 있었던 본사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왜 3개월간 용돈벌이 수학 학원 강사를 하면서 부모님 곁을 지켰는지는 모르겠다. 대학 입학 지원서를 딱 한 장 쥐여주시면서 문과였던 딸을 무턱대고 공대로 입학시켰던 아버지는 내가 자신의 곁에 머물러 준 것이 기특하다고 하셨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는 찾아오지 않았던 권태감이 수학 강사 3개월 만에 찾아왔다. 2002 월드컵 시즌 특권으로 붉은 악마 티셔츠 안에 하얀 티 한 장을 덧입는 것은 필수, 거기에 볼 한쪽에 태극기 스티커를 붙이거나 수업 집중을 위해 우리 가락에 맞춰 나팔을 불고 손뼉을 치기도 했다.

“짜악짝 짝 짝” 그때 그 시절의 박자는 아마 90년대생까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한껏 다양한 멋을 부리며 출근해서 퇴근은 경기장에서 할 수 있었던 참 좋은 날이 많았음에도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라는 고민이 결심으로 바뀌던 날, 나는 결국 서울행 이력서를 접수했다. “엄마, 나 지금은 수학 강사 안하고 싶어. 내 나이가 아깝단 말이야. 수학 강사는 조금 더 있다가 하고 싶을 때 다시 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가야겠어. 벌써 이력서 넣었어.” 결심의 통보였다. 엄마의 단념을 바라는 통보.

출근이 늦은 학원 강사 딸과 매일 점심 우동·짜장·볶음밥을 번갈아 시켜 먹으며 막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했던 갱년기 엄마의 얼굴에 순식간에 잿빛 그늘이 드리워졌다. 내가 싫어하는(혹은 조금 무서워하는) 엄마의 건조한 눈동자. 플랫폼까지 쫓아 나와서 눈물을 글썽이는 엄마에게 “2주에 한 번씩은 꼭 내려 올 테니 건강하게 지내줘”라는 말을 남기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기차에 올랐다.

‘지금 내 선택이 옳은 걸까’

친구 집에 한 번씩 다녀가던 서울의 바람과 상경 후에 느껴지는 첫 가을의 찬 공기가 조금 다른듯했다. 서울의 남동부 잠실 석촌호수. 점심시간이 되면 사무실에 비치된 공짜 커피를 핫팩 삼아 쥐고선 컴퓨터 앞에서는 도무지 맡을 수 없는 서늘하리만큼 시원한 가을 공기를 맡으며 ‘서울 참 달콤하다 달콤하다 달콤하다’를 몇 번씩 뱉어냈다.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가슴이 시킨 상경을 머리가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아니 그런 거창함 말고, 곧 다가올 첫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두려움에 대한 주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의 첫 겨울은 역시나 매서웠다.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 ‘아 이런 게 진짜 그 말로만 듣던 칼+바람이구나.’ 갑작스레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새파란 젊은이에게 따끔한 훈계를 전하시면서 계약서 조항대로 월급은 절반만 주겠다고 하시며 백만원 남짓한 돈을 봉투에 담아주셨다. “너무 죄송합니다 원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동그라미 여섯 개가 들어 있는 두툼한 봉투였지만 남녀공용 샤워실을 써야 하는 고시원에 짐을 풀고 한 달을 살아내야 했기에 계절 맞이 옷을 장만할 수 없었던 것이 추위를 더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상경하는 조카들에게 반드시 조언을 건넨다. “서울 겨울, 저엉말 춥다 얘들아.”

내 이력서를 받아준 곳은 주간마다 신문이 발행되는 작은 신문사였다. 일주일에 한 부의 신문이 발행되기까지 열심히 취재를 뛰고 인쇄소에서 밤을 새워 오탈자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면 꿀맛 같은 반나절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입사한 경진 선배와 동기처럼 어울리면서 충무로 인쇄소 앞 24시 김치찌개 집에서 늘 그 반나절 휴식의 새벽을 맞았다. 인쇄소 잉크 냄새를 확인하고 나오는 새벽엔 김치찌개와 찜질방을 거쳐서 고시원에서 나란히 밀린 잠을 몰아서 잤다. 경진 선배는 나와 함께 출퇴근하고 싶다면서 먼저 계약했던 여대 앞 고시원 방을 비우고 내 옆방으로 이사를 와줬다. 삼전동 현민 고시원. 아직도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잊어. 약 3년을 머물렀던 그곳에 우리 부모님, 언니네 부부, 조카들이 다녀갔고 법조계 은퇴 자금으로 고시원을 차리셨다는 사장님은 그때마다 1인 1방을 무료 숙박으로 내어주시며 가족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그때 나에겐 서울 아빠 같은 분이셨다. 경진 언니와의 동거동락이 서울의 첫 추위를 이기게 해주었지만, 마이펫의 이중생활을 능가하는 신문사 사장님의 이중생활과 대내외적 이중언어가 나를 힘들게 했다. 보름씩 늦어지던 월급이 한 달로 미뤄지던 여름, 나는 첫 직장에서 두어 번 만났던 인연으로 서울 본사에서 같이 일해보자던 남 부장님의 끈질긴 제의를 마침내 수락하고는 00저널 본사에 합류했다. 진 팀장. “거기 월급 얼마야?” 차마 월급이 계속해서 늦게 들어오다가 이제는 한 달이나 밀려버렸다고 말을 하는 건 내 콧대를 내가 깎는듯했다. “내가 거기보다 40 더 줄게. 내일부터 출근해서 같이 일하자, 진 팀장.” 어스름한 저녁 시간 본사 앞 실내 포장마차에서 만난 남 부장님은 취기를 빌려 ‘선 움직임 후 결심’이 강점인 나를 움직였다.

다음날 나는, 25살의 젊은 팀장으로 최소한 나보다 한 두어 살 이상 많은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화여대, 연세대, 카톨릭대, 시립대... 무얼 해도 좋을 듯한 이력을 가진 그들이 어쩌다 시골 쥐 팀장 아래에서 가을을 맞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그들과의 인연에 감사함을 간직하고 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깍듯한 맞이를 받은 후 자리한 내 책상 위에는 ‘팀장’이라는 명패와 함께 상경 후 맞이해야 했던 두 번째 가을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당신 자리에 내가 먼저 와 있었어요. 바로 여기.” 황송하면서도 어색한 직함이었다. 가을바람 묻은 낙엽 한 장이 창문 사이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서울 팀장님은 시골 쥐’

이전 02화50 다이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