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이어리

20' 마지막 이야기

by 코스모스처럼

지옥으로 도망치다

엄마가 그랬다. 신부는 5월의 신부가 최고 아름답다고. 지나고 보니 그 말은 완연한 봄 햇살과 만개한 봄꽃들이 신부를 더욱 예뻐 보이게 하는 계절이라는 뜻이란 걸 알았다. 신부는 다 예쁘다. 사랑에 만취한 상태에서 고르고 고른 드레스를 입고 꿈꾸던 행진 피아노에 맞추어 사뿐사뿐, 평생에 한 번 지을까 말까 한 수줍은 미소로 고개를 떨구며 치마를 꼭 부여잡은 순간, 딱 그 순간을 포착해서 셔터를 눌러주는 작가님은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예술가일 것이다. 나는 도서관 게시판에서 졸업생 여럿의 부러움을 샀던 K군과 결혼을 했다.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 말고 딱 붙는 크롭티에 와이드 팬츠를 입고 학생회관 앞 벤치에 마주 앉았을 때 그는 두툼한 지갑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나 너 밥 사줄 돈 이만큼 있으니까 앞으로 나랑 밥 먹자.” 당당할 만한 배춧잎 한 포기였다. 그 돈이 말년 병장의 월급 뭉치였다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나와 그는 4년 동안 몇 번 밥을 먹었다. 다가오는 듯하다가 멀어지고, 없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순수하고 슬퍼 보여서 나의 모성애 가득한 마음을 건드릴 때가 많았다. 들이대는 수컷들이 가득한 공대에서 그는 늘 수줍남으로 내 곁을 서성였는데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설레고 좋았던 시간이었다. (썸이 최고다. 썸 타세요 썸타!)

검정색 단정한 수트 말고 아이보리색을 금박 무늬로 덮은 앙드레 킴 선생님 손을 탔을 법한 양복을 걸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그는 신랑 입장으로 빨리 자신의 멋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반면, 졸업과 함께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남성들과 어울려 작업하고 밥을 먹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뼛속까지 공대녀가 되어버렸다. “드레스 추천해주실래요?”라는 물음에 “이 드레스가 신상이에요”라는 말을 듣고는 드레스 고르기를 단숨에 끝냈다. 누구나 다들 결혼 한 달 전부터는 피부관리·체형관리를 받는 다는 것 정도를 알 리가 없었던 나는, 결혼식을 앞두고 휴가를 받아 내려온 친정에서 일주일간 하루 네 끼니를 챙겨 먹고는 몇 킬로그램을 더 찌워서 드레스를 입었다. 들어간 게 다행이다. 눈을 감고 쪽잠을 자는 동안 디자이너 언니의 취향대로 화장과 머리 스타일이 갖추어져 있었다. 어린 신부의 자신감이었을까. 27살의 로즈데이, 엄마가 권했던 5월의 봄에 나는 잘 알지 못했고 철저히 준비하지도 않았던 결혼식을 천방지축으로 치루고는 예쁜 웨딩카 말고 속도 빠른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난생처음 둘이 떠난 여행이 신혼여행이었음에도 예쁜 슬립 하나 준비해가지 못해서 남편은 비오는 날 동문 시장에 들러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보리색 실크 슬립이라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미안해 착한 사람아. 내가 좋아하는 카고바지, 청바지, 흰색 티와 커플 남방만 챙겨서는 달랑 신혼 여행이라는 걸 떠났으니 나도 돌이켜보면 참 지적할 게 많은 여자다. 내가 졌다 졌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나는, 내가 들어선 곳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의 도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고 내 아들 뺐겼다아” 신행 후 첫 식탁에서 흐느끼는 어머니를 마주하고는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미안하셨던 시아버지는 “그만 해!” 어머니를 나무래셨다. 그리고는 뒷짐을 지고 돌아서 베란다 문을 여시던 아버님. ‘나 지금 당신들과 함께 하는 첫 식탁인데요. 오늘 오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시댁 입성한 거라구요.’ 뭐가 슬프셨던 건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학생 때 임원 식사를 하러 와서 뵌 적이 있던 분이셨다. 나의 시어머니가 되실 분. “너 많이 예뻐졌다?” 결혼 전 두 번째로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매서운 눈을 뜬 어머니는 나에게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으셨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을 막지는 않으셨기에 우리 둘은 후다닥 양가 부모님이 합의한 결혼식 날 뭣 모를 결혼식을 올리고는 신혼여행을 다녀 온 것이었다. 나의 오랜 친구, 학교 선배와의 동거. 딱 거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단순한 결혼이었다. 공대녀는 복잡한 게 싫으니까. 어머님이 눈물을 흘리신 후 몇 달간, 주말마다 이어진 시댁 친척들께 인사 다니기는 첫째를 임신하던 초겨울까지 이어졌다. 두 분은 육 남매의 장남·장녀이시고 나머지 오 남매 동생들이 모두 서울에 살면서 자녀를 낳으셨으니, 내가 품어야 할 시댁 식구는 족히 서른 명은 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버님의 부모님과 어머님의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나는 비 오는 날은 국수를 만들러, 크리스마스엔 선물을 사서 조부모님댁을 자주 방문하는 착한 손부가 되어야 했다. 그때 알았다. 학교를 요란스럽게 했던 그 K군은 양가에서도 소란하게 이슈가 되는 장손인줄을. 그것도 안동 장손말이다.

결혼을 빨리하는 여자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첫째는 다정하고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덕에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많이 보면서 사람의 내면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좋은 사람, 우리가 흔히 이름 붙일 수 있는 현모양처. “내 꿈은 현모양처예요”라고 말해 왔던 나의 실상은 두 번째에 속했다. 둘째는 자라온 환경이 보수적이고 부모님의 간섭이 심했던지라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해 다소 갑갑한 집을 탈출해서 천국으로 도망하고 싶은 사람들의 환상, 결혼을 천국으로 착각한 여자들의 결심, 그것이 두 번째 빨리 결혼하는 유형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주더라. 그건 착각이라고. 진작 말씀하시지. ‘아 그땐 유툽이 없었지.’

아무튼 나는 그 두 번째 유형의 여자로 답답했지만 나를 사랑했던 부모님을 떠나서 심장병이 생길 만큼 입을 다물어야 했던 지옥으로 도망쳐왔다. 다시 건너가면 안되는 다리-우리 부모님 얼굴을 생각해서 돌아가는 길에 노란색 접근 금지판을 세워둔 저편을 바라보면서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살다가 살다가”에 빠진 가사, 살다가 살다가 심장병에 걸렸다.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스트레스가 지속되다 보면 가슴이 조여와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심근경색.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결혼 후 일 년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주로 결혼 10년 동안 나는 일주일에 몇 번씩 갈비뼈 중간 움푹한 곳을 손으로 둥글게 둥글게 문지르면서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를 반복하는 날이 많았다. 그나마 몇십 분간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지나가고 나서야 뱉을 수 있는 주문이었다. 고통이 처음 찾아올 때는 TV 언저리에 있을 리모콘을 찾아 손을 더듬고 기어가면서 밖으로 잘 들리지도 않는 떨림으로 겨우 아기의 이름을 부렀다. “00야 미안해, 우리 비디오 조금만 볼까?” 아무거나 눌러지는 대로 리모콘을 누르면 곧잘 비디오를 보며 엄마가 다시 다정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주는 순둥한 아이였다. 고개를 돌리고 방바닥에 웅크리고선 이 고통이 저 소중한 아이를 위해 빨리 좀 도망가 주길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 버텼다. 나는 4대째 이어오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십자가 수저여서 저승사자를 드라마 <도깨비>에서만 보았지만, 만약 그 드라마가 일찍 방영했다면 “왜 당신 여기 온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심장 조임을 견뎠던 10년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도망 온 것이었는지를 뭉텅거려 기록하게 하는 대표 증상이다. 그 외의 이야기들은 소설 속에서도 비밀로 덮어두고 싶다. 누군가에게 읽혀지는 재미가 되고 깜짝 놀랄만한 가십거리가 가득한 십 년 일기지만 나는 꺼내 먹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서 가슴과 등이 붙어버리는 것 같은 고통이 아직도 느껴진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나처럼 심장통을 앓는 사람에게는 우*청심원이 좋다고 했다. 아니 약사님께서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셨다. 자세히 읽어보니 설명서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효능·효과] 언어장애, 혼수, 정신 혼미, 안면 신경마비, 두근거림, 인사불성에 효과가 있음. 결혼할 때 제일 좋은 냉장고와 세탁기를 혼수로 해 온 것 말고 나머지는 모두 내가 지옥 같은 결혼 생활 동안 겪어 보았던 증상이다. 진작 약사님이랑 친하게 지낼 걸 그랬다. 나 혼자 감당하던 고통을 청심원이 알아주고 해결해주던 날부터 나는 자주 약국에 들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아들과 너 합방 하는 거 못 본다, 야 이게 너” 이렇게 막말하는 시어머니 입병에 잘 듣는 약 있으면 빨리 주세요! 그게 내 덮어 둔 비밀의 썸네일이다. 우리 집보다 더 좋은 형편으로 경제력을 본 결혼도 아니었고 나보다 높은 졸업장을 가진 엄마 친구 아들과의 결혼은 더욱 아니었는데, 나는 왜 손으로 가슴만 부여잡고 그 시간을 외롭게 참아왔을까. 고통의 해법을 발견하고부터는 십 년의 시간을 조금 수월하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사이 나는 두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키웠고 우리 시부모님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세 분의 조부모님을 잘 모시고 마지막 식사까지 챙겨드리는 효를 다하고는 세 분의 입관식에 손부로 참여했다. 그리고 6년 전부터 (돌아가신) 우리 아빠 덕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수학 강사가 된 나는, 내 분야에서는 최고의 인정을 받았고 또 이렇게 내 인생의 자전적 소설을 쓸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지옥의 끝은 지옥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지옥은 신학적 해석에 맡겨두길 바란다) 그러나 현생에서의 지옥에 영원함은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감사함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사람의 망각, 망각할 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는 거라는 말에 극한의 아픔을 겪어 본 나는 백 퍼센트 동의한다. 망각은 인생의 슬픔을 지워준다. 둘째는 시간은 저절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운 사람은 꿈이 있고 그럴만한 행복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 사람에게는 1분이 한 시간처럼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사람에게는 맑은 날도 흐린 날도 그날이 그날이다. 그래도 다만,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 당신의 아픔도 슬픔도 곧 회복되고 잊혀질 거라고 도움 안되는 말이라도 자꾸만 건네고 싶어진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사람만 보면 남 같지 않은 나. 나의 20대 다이어리는 뒤죽박죽이다. 꿈이 없었다가 있었다가, 관계가 달콤했다가 미지근했다가, 내 나이가 아까웠다가 ‘차라리 3자 말고 4자로 바뀌어라. 이 모든 고통이 빨리 좀 지나가게’라고 주문을 외웠다가의 반복이었다.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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