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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an 25. 2019

제주도와 겨울


"현재는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시간이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만 방금 대충 지어낸 말이다. 제주도의 바다 앞에 있는 한적한 카페에서 멍 때리다 보면 생각나는 과거뿐이었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 과거에 했던 실수 뭐 그런 거. 그런 과거 속에서 문득 떠오른 건 나는 항상 제주에 겨울에 왔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1월에만 3번 왔다. 그전에 3월에 한 번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도 오긴 했지만 관심 없어서 숙소에서 포커 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심지어 한라산 올라갈 때도 버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단체여행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겨울의 제주도라는 건 어찌 보면 나라는 사람을 꽤 잘 표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제주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여기에는 상대적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야 될 것 같다. 블로그에 자주 뜨는 유명한 맛집에는 평일에 가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된다. 그 외에는 한가한 편이다. 게스트하우스 같은데 가도 겨울이라 파티를 안 하는 곳이 많고 연말연시가 아닌 1월 중순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안 좋아한다. 맛집을 찾아가도 사람이 많아서 말을 하기 힘들면 옆에 있는 프랜차이즈 집에서 먹는다. 공연장에 사람이 꽉 차 있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느끼기보단 화장실이 걱정된다. 어떤 모임이든 한 테이블이 차는 정도가 좋다. 그래야 자기 얘기를 넉넉하게 할 수 있으니까.



 겨울의 제주도는 내륙보다 덜 춥다.


 춥지 않은 게 아니라 덜 춥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울이 영하 10도라면 제주도는 영하 1도 정도로 안 추운 건 아니다.  추위에 약한 나는 빌딩 사이에 부는 찬바람을 맞다가 덜 추운 곳을 떠올리고 제주도 비행기 스케줄을 확인한다. 따뜻한 동남아나 아니면 더 멀리 호주 같은 곳을 갈 생각은 않고 그냥 덜 춥고 가기 쉬운 곳을 떠올린다. 제주도는 딱 그 정도다. 살아온 인생을 돌이키면 비슷한 거 같다. 추울 때 저 멀리 따뜻한 곳이 아닌 가까운 덜 추운 곳만 찾았다.



 처음에는 혼자, 두 번째는 친구와 둘이서, 이번엔 셋이서 왔다.


 보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여러 군데 가는 것보다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는 걸 좋아한다. 처음 왔을 땐 여행이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이름 밤에 문을 닫는 가게 앞을 서성인다거나 버스 하나 잡기 위해 두 시간 넘게 기다렸다. 친한 친구와 왔던 두 번째에는 좀 더 나아졌지만 숙소를 동쪽 끝과 서쪽 끝에 하나씩 잡아 제일 많이 기억 남는 건 차에서 티격태격거린 것 정도다. 이번 여행에서는 대부분의 맛집을 웨이팅이 있기 직전 자리 잡을 정도로 여행에 능숙해졌다. 물론 내가 잘나져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내 옆에 여행을 많이 한 친구가 있었을 뿐이다.


 운전병 출신이라 렌트한 스포츠카도 능숙하게 모는 친구는 방금 지나친 여자 둘을 본 뒤 나에게 묻는다.


 "왼쪽? 오른쪽?"

 "왼쪽, 검은색 코트."

 "저도 왼쪽이지만 형한테 양보할게요오."


 눈길도 못 마주친 여자들을 두고 멋대로 양보하고 우정을 확인한다. 앞에 앉은 멍청한 남자 둘을 바라보는 다른 친구가 한심한 듯 바라본다.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둘과 한숨 쉬는 한 사람. 훌륭한 조합이다. 3년 전 홀로 제주도에 왔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어떻게 느낄까. 나이 들면서 삶의 진보가 느껴지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어쩌면 좋은 사람을 찾아내는 재주는 나아졌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얼굴에 느껴지는 바닷바람이 덜 차갑게 느껴졌다.


 다음 겨울에는 덜 추운 곳이 아닌 따뜻한 곳을 찾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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