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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Sep 01. 2016

솔직함의 경우

돌직구를 던질 때 필요한 컨트롤

 빈말 안 하는 사람


 요즘 자주 듣는 말이다. 대학에 들어온 뒤부터 줄곧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알바, 대외활동, 동아리, 학원 등에서. 대학은 분명 이전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리를 이어줬다. 스케쥴러 어플에 일정을 꽉꽉 채우는 것에 보람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게 작년 11월 알바를 그만둔 이후부터 새로운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사라졌다. 그 시간이 어느덧 9개월 남짓 지났다. 길어진 혼자만의 시간과 그나마 만나는 사람들은 어깨 힘을 빼고 만날 수 있는 친한 친구들 뿐이었다. 새로운 물을 계속해서 퍼올리던 내 안의 연못은 고인 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투명했던 물이 한 가지 색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있을 땐 이미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파악하고 같이 지내온 시간이 있기에 관계의 맥락이 생긴다. 쌓아 온 맥락 덕분에 단어나 어투로 인한 오해는 잘 일어나질 않는다. 직설적인 말을 해도 상대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기에 쉽게 멀어지지 않는다. 말을 내뱉을 때의 필터링 과정이 생략되거나 축소될 때가 많다. 어느새 난 '빈말 안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아리 선배들과 술 한 잔 하던 5월의 금요일 밤, 한 선배가 문득 졸업생들을 포함한 엠티를 기획해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졸업생과 재학생을 합쳐 중간 학번에 있는 내가 주도적으로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어떤 대답을 할까 생각한 후 조용히 내뱉었다.


 "형, 미안해요. 못 하겠어요. 제가 엠티를 싫어하거든요."


 엠티를 싫어했다. 새내기 시절 두어 번 가고 질려버렸다. 스무 명 남짓 펜션이나 엠티촌에 가서 낮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고 밤에는 종잇장 같은 고기를 먹으며 쉬지 않고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다들 쩔은 얼굴로 서로를 맞이하는 그 활동이 무슨 매력이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2학년 때 내가 동아리 패장을 했을 때도, 엠티를 기획하는 게 나였음에도 제일 가기 싫어했었다. 어디 여행 갈 땐 주로 혼자 가거나 많아봤자 2명 정도가 한계인 나에게 단체로 어디 간다는 건 어떤 매력도 없었다. 차라리 회비만 내고 집에 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이유를 그 자리에서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나보다 9년이나 먼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내가 입학할 무렵엔 이미 졸업한 그 선배 앞에서 그렇게 얘 할 수 있는 건 같이 술잔을 기울인 시간만큼 그 선배가 이런 내 성격을 이해할 수 사람이기도 했고, 근래에 짙어진 내 색깔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었던, 그 날 처음 술을 같이 한 나보다 2학번 위의 선배는 그게 영 못마땅했는지 둘이 있을 때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라는 말을 연신 반복했었다. 사실 그 말을 하기 전부터 그 선배의 어투나 말하는 내용으로 볼 때 그런 반응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뱉었고 동시에 반년 전의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같이 있을 땐 좋을 대로 행동하자'라는 행동원칙이 박혀버렸다. 그냥 그래도 될 것 같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신의 색깔이 짙어지는 것과 더불어 사고의 비중에서 잡생각이 높아진다. '나는 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솔직함을 지향하는 걸까'라는 것에 대해 파보기 시작했다.


 이유 중 하나는 근래 얻은 깨달음이었다. 인간관계를 돌이켜 봤을 때 오래가는 인연은 내 본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뿐이라는 것. 상대에게 좋은 모습을 어필하기 위해 꾸민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은 여럿이서 있을 땐 나쁘지 않지만 둘이나 셋 정도 있을 땐 몰개성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어 관계가 지속되어 봤자 오히려 본래의 내 모습이 드러났을 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소릴 들을 뿐이었다.


 거기에 솔직함은 상대방에게 올곧이 전달되었을 때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작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유아인은 수상소감에서 연신 '부끄럽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속에 있는 말을 단어 단위로 알음알음 꺼냈다. 어떻게든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언어화의 과정에서 유리되지 않기 위해 쥐어짜내듯 내뱉는 그 어투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울림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솔직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울림을 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솔직함을 위해 어떠한 예의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당위성이 짙은 예의라는 표현보다 객관적 요소가 강한 '경우'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경우가 없는 솔직함은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빈말을 안 하는 나의 지향점은 '솔직하되 경우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다.



 경우를 지키면서 솔직해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직설적인 말을 할 때 '돌직구를 던진다'라는 식으로 비유된다. 그러니 경우를 갖춘 돌직구는 이를테면 150km의 돌직구를 던지면서 컨트롤도 좋아야 되는 거다.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알 거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가능한 투수는 국내 리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가서도 에이스 취급받는다.


 상대방에게 민감한 내용을 언급하는 건 몸 쪽 공을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야구공은 잘못해서 몸에 맞으면 정말 아프다. 똑같이 둥글게 생겼어도 그 묵직함은 축구공이나 테니스공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이라는 어미만 붙었지 그냥 돌이다. 맞으면 처음에는 무언가 굉장히 불합리한 통증이 오고 이는 고스란히 던진 사람(투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게 고의라고 판단되면 방망이 들고 쫓아가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고 절묘하게 파고 들어간 몸 쪽 스트라이크는 좋은 투수를 판가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어떠한 관계든, 깊어지기 위해선 좀 더 서로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바깥쪽 공만 던지는 투수가 쉽게 공략당하듯 서로에게 동 떨어진 얘기만 하는 건 얕은 관계에 머물 뿐이다. 모두가 알지만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에겐 전혀 관련 없는 얘기, 예를 들면 무한도전이나 연예인 가십거리 같은 거. 그렇다고 개인정보를 늘어놓으란 건 아니고 그냥 오늘 있었던 일, 거기서 만난 사람, 그를 통해 전해진 나의 느낌이나 생각 같은 걸 하나씩 풀어내면 된다. 동네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듯 상대방 라켓에 셔틀콕을 틩겨 주며 공이 떨어지지 않게 이어가면 그만이다.


 대체적으로 민감한 주제라 하면 외모, 학력, 수입 같은 것일 게다. 이는 농담의 대상으로도 다뤄서는 안 된다. 기본적인 경우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영역을 넘어, 각자에게 민감한 영역은 생각보다 편차가 꽤 크다.


 예의라는 것도 그 중 하나로 의외일 수 있는데 곰곰이 보면 꽤나 상대적이다. 우리나라에서 'ㅁㅁ할아버지'가 미국으로 가면 'bob'이나 'sam'이 되는 문화적 상대성뿐만 아니라, 개인 간에서도 그 편차가 상당하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했던 두 선배의 이야기. 9학번 위의 선배는 솔직한 내 말을 예의라는 것과 결부시키지 않은 것일 테고 2학번 위의 선배는 자신이 항상 지켜왔던 선후배 간 예의라는 기준에 내가 엇나간 것으로 본 게 아닐까. 더 나아가면 이러한 기준을 지켜왔던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도 느껴질 수 있고. 단순히 한 명은 너그럽고 다른 한 명이 속이 좁은 게 아니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까워지는 과정은 조심스럽게 대하던 상대가 덜 조심스러워지는 과정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대답, 반복되는 대화 속에 자신을 조금씩 담는다. 내가 하는 일, 어제 본 영화에서 내가 느낀 것, 과거의 연인 같은 것을. 그렇게 몸 쪽으로 조심스럽게 공을 내던진다. 묵직한 돌직구는 투수를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타자에 대한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분명 나는 누군가의 옆구리나 팔꿈치를 맞출 수밖에 없겠지만 그 성패의 과정 속에서 공을 던지는 내 컨트롤이 향상되기를 바랄 뿐이다. 공을 맞은 상대가 방망이를 들고 오는 건 상관없지만 맞은 상대가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공효진의 연기를 좋아해 트레드밀 위에서 본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기상캐스터라는 특정 직업에 모든 비정규직의 불합리함을 다 집어넣은 듯해 더 이상 보기가 힘들었던 그 드라마에서, 공효진이 맡은 표나리는 호감을 가진 남자에게 다가가면서 조심스럽지만 과감하게 속내를 드러낸다.


저는 항상 친구나 연인이 필요해서요......


 멋쩍은 듯한 그녀의 대사에는 사람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나도 똑같은 맘이다. 그렇기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든, 나는 아직 한참 투른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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