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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20. 2016

요구할 수 있는 친절함의 정도

웃음의 가격

 경영대 복사실에 오랫동안 일하고 있는 아저씨 한 분이 있다. 때가 낀 팔토시 십 년도 더 돼 보이는 안경을 쓰고 계신 이 분은 항상 바빠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강의 직전에 급하게 레포트 출력을 하러 오는 나 같은 학생이 많기에 바쁜 모습밖에 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이 아저씨는 시종일관 딱딱한 반말로 일관하며 바쁠 땐 오직 출력만 허락하고 복사는 안 해준다(복사실인데 복사를 안 해준다). 바쁜 시간에 한 두 장 출력할 때는 가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친구들 중 더러는 이 아저씨의 불친절함을 이유로 복사실에 가길 꺼려하기도 한다. 그렇게 주위의 얘기와 실제로 보는 것이 쌓여가면서 나 역시 그분의 불친절함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 주위에서 제일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어 자주 가는 카페에는 마감 담당으로 보이는 직원 한 분이 있다. 그 분에 대해 깊은 인상이 남은 계기는 앞의 어르신과는 반대로 친절함이었다. 처음 갔을 때 우리 학교 재학생 한정으로 20% 할인해 준다기에 학생증을 내밀었다. 진동벨이 울려 커피를 가지러 갔을 때 무릎 담요를 부탁했더니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했다. 도난 방지를 위해 그런 듯했다. 개의치 않고 적어 내었다. 이튿날부터 적어도 그 직원이 있을 때 나는 학생증을 내보이지 않아도 할인을 받을 수 있었고 음료를 받으러 갈 때 별도의 부탁 없이도 무릎담요를 같이 받을 수 있었다. 4월이 시작할 때 즈음 날이 따뜻해졌는데 여전히 무릎담요가 필요하냐고 물은 게 다였다. 무엇보다 가게에 들어설 때, 음료를 받을 때, 컵을 반납할 때마다 직원분은 웃으며 맞아줬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마치 '손님을 응대하는 모든 직원은 친절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식 도덕률을 강조하는 듯 보이는 데 결단코 그건 아니다. 하나의 경우가 더 있다.


 올해 초 일본 여행 갔을 때 일이다. 친구 선물로 티셔츠 한 장 사러 역 부근에 있는 지하상가에 갔었다. 친구 취향도 잘 모를뿐더러 여자 옷이기에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옷을 골랐다. 결국 직원의 추천에 따라 옷을 고른 뒤 계산을 마쳤다. 안내하는 직원은 내내 웃음을 잊지 않고 '일본에서 사 왔다는 느낌의 티셔츠가 있나요?'라는 되먹지도 않은 내 질문에 성실히 답 해주기까지 했다. 쇼핑백에 옷을 넣고 리본까지 붙여줬다.


 그렇게 기분 좋게 쇼핑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찰나 그녀는 계산대에서 옷을 받으려는 나의 손이 머쓱하게 상품을 들고는 카운터를 돌아나왔다. 입구까지 안내해주겠다 했다. 일본의 지하상가라 해도 종로나 강남역의 지하상가 구조와 크게 다를 바 없기에 계산대에서 입구까지 다섯 걸음밖에 안 되었다. 포장한 옷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온 그녀는 입구에서 90도로 숙인 채 옷을 건넸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물건을 건네받았다. 친절함에 대한 감동보다는 멋쩍음과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접객 문화가 가진 차이를 고려해도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카페, 술집, 레스토랑 등 다양한 곳에서 알바를 해봤기에 어딜 가든 종업원에게 기분 상할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바빠 보일 때는 '천천히 주세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음악을 듣다가도 주문할 때는 이어폰을 귀에서 뗀 뒤 말한다. 사람에 대한 존중, 감정노동 같은 거 이전에 '내가 당해서 기분 나빴던 것'을 안 하려는 거다.


 여기까지 글을 이어와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누군가의 불친절이 크게 나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한 적은 사실 별로 없다. 위의 경영대 복사실 예가 극단적일 뿐이다(하나 더 추가하자면 문과대 복사실도 별로다. 복사실 사람들은 다들 왜 그럴까). 그럼에도 분명, 나는 정류장 건너편 편의점에서 아침 근무를 하는 할머님의 자연스러운 미소가 좋고 가게에 들어가 내가 부를 때까지 고개도 돌리지 않는 골목길 수선집 아저씨의 무심함은 별로다.


 이에 대응하는 나의 행동은 집 근처 수선집을 놔두고 버스 타고 한 시간은 걸리는 홍대 수선집에 모아둔 옷을 맡기는 것 정도다. 항의하기엔 지나치게 사소하고 무시하기에는 조금 신경 쓰인다.


 문득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요구할 수 있는 친절함은 어느 정도 일까? 가게에 들어설 때 웃으며 응대하는 것? 번거로운 주문을 해도 개의치 않는 것? 가게 앞까지 마중 나가서 90도로 인사하는 것? 애초에 친절함이란 요구할 수 있는 걸까?



 작년 여름에 갔던 오사카의 맥도날드에는 '스마일 0엔'이라는 표지가 카운터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0엔이든 1엔이든 웃음을 구입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간에 필요한 말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존중의 의미를 담은 웃음이 함께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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