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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07. 2016

왜 나는 너를 싫어하는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지켜야 할 매너

 최근에 친해진 한 후배한테 작은 고백을 했다.


 "나 얼마 전까지 너 싫어했었어."

 "왜요?!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었어요?"

 "아니, 작년에 내가 좋아한 여자애가 있었는데 남친이 있었거든. 근데 그 남친이 너랑 닮았어. 그래서 한동안 니 얼굴 볼 때마다 짜증 나더라고."

 "°_°"


 스스로 생각해도 부당한 미움이었다. 미움받는 사람이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이 모났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었다. 그래도 하나 자부심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그 후배를 참 올바른 방식으로 미워했다는 점이다.


 동아리 선후배 관계인 그와 나는 둘 다 회장을 맡았지만 3년 후배인 그는 내가 회장을 맡을 때 아직 입학 전이었고 그가 회장을 맡을 때 난 군대에 있었다. 서로 안면을 익히고 친해진 건 그가 제대하고 난 뒤였다.


 앞서 언급했듯 그를 싫어한 계기는 한때 내가 좋아한 여자의 남친과 그가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꽤 좋아했지만 그녀는 남친과 헤어질 맘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끝났다. 남친 얼굴은 카톡 플필사진이나 지나가다 두어 번 봤었다. 작년 이맘때 있었던 일이다.


 그즈음 그 후배가 복학했고 술자리에 몇 번 동석하면서 안면을 트고 서로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내가 주도하는 독서모임에 그가 들어오게 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싫어한다고 해도 사실 무관심에 가까웠다. 싫어하는 감정은 별 계기없이 스멀스멀 올라왔는데 스스로도 원인이 뭔지 몰랐다. 그러다 그녀의 남자친구 얼굴을 제대로 본 뒤에야, 그 원인을 알았다.


 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고, 그 이유를 규명한 뒤에 든 생각은 '조심해야겠다'였다. 신경 써야 할 건 말과 행동이었다. 우선 그 후배에게 나도 모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반감을 억제하기 위해 조심했고 나와 그 후배를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 후배에 대한 얘기는 웬만하면 삼가거나 말할 일이 있으면 의견이 아닌 사실만 전달하려 했다. 가령 '어제 술자리에 나갔는데 그 후배가 있었다' 정도만. 거기서 내가 느낀 점은 말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 후배에 대해 안 좋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독서모임을 같이 하면서 친해져 그 후배가 가진 인간적인 매력을 알고 머릿 속에서 '남친'의 이미지가 지워질 즈음,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지금은 그게 술 한 잔 하면서 농담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화제가 되었다.


 결국 나는 잘 몰랐던 한 후배를 싫어했고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은 없어졌다. 부당한 미움이었지만 그 감정을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남친이 있는 여자애였지만 한때 나는 걔를 좋아했었고 그녀가 남친이 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 감정은 그 남친을 닮은 그 후배에게 이어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항상 올곧은 방향으로만 갈 수 없다.


Untitled by NOOLEE, 네이버 그라폴리오


 누군가를 좋고 싫어하는 것은 감정의 영역이기에 거기에는 남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논리나 맥락이 없는 경우가 제법 많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이를 말하면서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 '좋고 싫은' 문제를 '옳고 그른'문제로 변형시켜 공감을 유도한다.


 예를 들면 한창 그 후배를 싫어할 때 만일 그가 나한테 인사를 제대로 안 했다든지 말실수를 했다고 하자. 그 점을 아니꼽게 본 나는 그의 선배이자 내 동기인 누군가에게 그의 예의 없음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평소에 그런 걸 별로 신경 안 쓰는 내가 그런 걸 주위 깊게 바라본다는 것 자체에서 그 후배에 대한 미움이 그의 사소한 잘못에 의미를 부여해 인식의 왜곡을 일으킨 것이다. 인식에 있어서의 왜곡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난다. 긍정적인 의미지만 누군가에게 반해서 '콩깍지가 씌인 경우'가 흔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왜곡을 스스로도 인식 못한 채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면 이는 '좋고 싫은'게 '옳고 그른' 문제가 된다. 그렇게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옮겨져 미움의 대상이 된 누군가는 당위의 영역에서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이 된다. 여기엔 선후배라는 역학관계도 한몫한다.


 '미안해, 내가 널 오해했네' 하면서 시간이 지나 무마할 수도 있다. 오해는 마치 우연히 일어난 사고와 같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앞선 예에서 보듯 내가 그 후배를 싫어한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였기에 그 오해에는 의지라는 요소가 들어있다. 누군가를 오해한 사람도 오해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해의 여지를 만든 네가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해의 영역에서 자신의 의지가 갖고 있는 지분을 간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내재 되어 있는 전제는 '나는 도덕적으로 무결하진 않지만 적어도 평균 이상은 된다.'다. 거기에서 비롯된 '나는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확신은 누군가를 향한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오해로 무마시키려 한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악마 같은 선임이 자신을 괴롭힌 사연이 꼭 하나씩은 있다. 하지만 내가 선임일 때 누굴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모두가 괴롭힘을 당했는데 대체 그 괴롭힌 선임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사실은 그 선임들이 전부 진짜 악마여서 전역 후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걸까?




 필요한 것은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대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도덕적인 영역에서 스스로를 향한 의심은 언제고 필요하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은 한정되어 있기에 거기에서 비롯된 편견은 도덕적 판단의 편향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편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사고가 필요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게 논의하긴 어려울 듯 싶다.


 '사람 미워하면 안 된다'라는 말은 별로 안 좋아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자연스럽듯 싫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감정으로 인해 그 대상이 부당한 피해를 받지 않게끔 조심해야 한다. 그게 '올바르게 미워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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