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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09. 2019

완성된 모자이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로켓맨>, 덱스터 플레처



 평론과 관객평은 일치할 때도 있고 가끔씩 심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최고의 평단이랄 수도 있는 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개봉 직후부터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천만을 바라보는 현상을 보면 평론과 관객평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높은 관객 점유율의 요인이 작품 자체뿐 아니라 봉준호라는 감독의 국내 인지도, 개봉 직전의 칸 영화제 수상으로 인한 화제성 같은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조용히 개봉한 <로켓맨>이란 작품은 <기생충>이 없었으면 좀 더 화제가 될 수 있었다. 작년에 이례적인 역주행으로 천만 가까이 관객을 동원한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슷한 구조에, 국내에서는 덜 알려졌지만 위상에 있어서는 퀸에 결코 밀리지 않는 엘튼 존의 일대기를 다뤘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엘튼 존을 몰라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개봉 이후 첫 주말인 지금 상황을 보면 조용히 극장에서 내릴 가능성이 크다. 1 UBD(17만 명) 달성이 힘들어 보인다. 내가 일하는 극장에서도 개봉일에 하루 7회 차 정도 상영하던 게 첫 주말이 되자 하루 1회 차로 줄어들었다. 그 빈자리는 반등을 시작한 <알라딘>이 치고 올라왔다.



 그런 <로켓맨>이지만 평론을 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아마도 LGBT라는 소재를 엘튼 존의 명곡과 함께 다룬 점 때문이었을까, 상당히 후한 편이다. 심지어 '<보헤미안 랩소디>보다 낫다'라고 명확하게 적시한 평도 있다. 그 평이 온전히 이해 불가능인 건 아니다. 그럴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로켓맨>은 <보헤미안 랩소디>와의 분명한 차이점이 느껴진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라는 개인에 비중을 많이 뒀지만 마지막 20분을 장식한 라이브 에이드를 보면 '퀸'이라는 그룹과 그들의 음악에 초점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보컬도 배우에 의지하는 게 아닌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과 최대한 흡사하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 <로켓맨>은 철저히 엘튼 존 개인에게 비중을 맞췄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극 초반에 프레디 머큐리가 퀸에 합류하는 걸로 시작했다면 <로켓맨>은 엘튼 존의 유년 시절에서부터 시작한다. 개인사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로켓맨>이 훨씬 충실하다.


 변화무쌍한 엘튼 존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을까, 서사의 방향은 난반사하듯 튀고 엘튼 존의 음악은 쉼 없이 흘러나온다. 덕분에 영화에서 스토리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힘들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퀸의 노래가 온전히 공연이나 연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면 <로켓맨>은 뮤지컬 요소가 들어가 갑자기 모든 등장인물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영화 중반에 이미 대중가수로서 높은 성취를 이룬 엘튼 존에게 심각한 갈등은 오직 내면에만 존재한다. 거기엔 부모의 감정적 학대와 게이라는 정체성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갈등 요소들이 있으나 약에 취해 수영장에 빠져 '로켓맨'을 부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위대한 아티스트의 범접할 수 없는 내면세계만이 펼쳐진다. 스토리는 극과 극을 넘나드는 그의 감정에 의지한다. 예를 들면 러닝타임의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여성과 결혼하고 그 직후 바로 이혼하는 신.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도 이 신은 불필요해 보이고 스토리라인을 불안하게 한다. 그에 비하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훨씬 따라가기 가기 쉬운 스토리 구조를 보인다. 덕분에 관객은 퀸이라는 뮤지션과 그들의 음악을 영화에서 음미할 여유가 있었다. 그에 반해 욕심이 과한 듯한 <로켓맨>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많은 음악을 들려준다. 관객은 음악을 음미할 여유가 없다.



 내러티브가 부재하다는 평도 들었던 <보헤미안 랩소디>지만 오히려 <로켓맨>에 비교하면 기승전결에 훨씬 충실해 보인다. 보컬도 최대한 프레디 머큐리의 것과 흡사하게 표현한 것처럼 영화는 새로운 걸 창조해내는 욕심을 버리고 단순한 퀸이라는 뮤지션의 재현에만 집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라이브 에이드 장면은 그저 공연을 하는 것뿐인데 거기에 대한 배경지식을 이미 영화를 통해 충분히 습득한 관객은 감동한다. 기승전결의 훌륭한 '결'이다. 하지만 <로켓맨>은 혼란스러운 엘튼 존의 감정을 독백하듯 풀어내는 음악으로 표현할 뿐이다.


 덕분에 화려한 화면과 귀호강을 느끼게 해주는 사운드가 있지만 몰입도는 점점 떨어진다. 야구로 치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묵직한 돌직구지만 <로켓맨>은 직구 없이 변화구만 던지는 것 같다. 마치 서로 다른 색이 조각조각 합쳐진 모자이크 작품이다. 조각은 모여 엘튼 존이라는 그림을 완성하는 듯 하지만 그저 그의 희로애락이 표현되었을 뿐 짜인 이야기는 없다.



 만일 엘튼 존에 관심이 있고,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 전달 방법에 의미를 둔다면 <로켓맨>은 꽤나 만족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서사적 감동을 원한다면 추천하고 싶진 않다.


어쩌면 <로켓맨>은 좋은 영화일 수 있다.
완성된 모자이크를 멀리서 바라볼 여유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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