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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l 02. 2019

메뉴판이 긴 식당은 맛집이 아니다

<이케아 옷장을 타고 떠나는 특별난 여행>, 켄 스콧


타이틀이 길다


 메뉴판이 긴 식당은 맛집이 아니다. 대게 그렇다.

 타이틀이 긴 영화는 재미 없다. 이 영화가 그렇다.


 유럽를 동경하는 인도 청년이 여행을 통해 겪은 신기한 경험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내용을 한 영화에 몰아넣은 것 같다. 눈호강은 되지만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피자와 김치찌개와 마라탕을 좋아하지만 그걸 한꺼번에 섞은 요리를 좋아할 수는 없다. 하나의 영화에 잡탕처럼 섞인 내용들을 대체할 수 있는 훌륭한 영화가 이미 존재한다.


1. 파리는 사랑을 해야하는 도시인가



 주인공 파텔에게 파리는 특별하다. 인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매일 방구석 한 켠에 붙여진 에펠탑 사진을 보며 로망을 꿈꿨고 어머니가 얘기해준 특별한 경험은 자신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게 해줬다. 어머니가 죽은 뒤 일상을 뒤로하고 무작정 파리로 간 모두가 예상하듯 이국에서 미인(그런데 미국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적당한 클리셰 덩어리 스토리와 비입체적인 인물을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특별함으로 대체하려고 하지만 요즘 시대에 아파트 옆집 아주머니가 지난 주에 저가 항공기 특가로 다녀왔다고 하는 여행지가 파리다. 인스타에 #파리, #paris를 검색하면 수없이 많은 사진이 나온다.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 <웰컴, 삼바>, 올리비에르 나카체 and 릭 토레다노


 프랑스와 파리가 가진 상징성은 미디어가 발달한 요즘에는 층위가 훨씬 다양하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안함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퇴직 통보를 막기 위해 주말 동안 동료 직원들의 임금동결 동의를 받아야하는 주인공을 통해 드러나고, 트럼프의 미국이나 황교안이 꿈꾸는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이주 노동자에게 야박한 프랑스의 현실은 <웰컴, 삼바>를 통해 웃프게 드러난다. 2019년 한국을 살아가는 관객이 보기에는 영화에서 재현된 뻔한 파리의 모습보다 인도의 모습이 훨씬 이국적이다.


2. 낯선 곳에서 만난 운명적 사랑



 일본에 갔으니 온천을 들렀다 초밥을 먹는 코스처럼 주인공은 파리에 가서 낯선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계기는 첫눈에 반해서.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뻐서. 이케아의 쇼윈도 매장에서 갑자기 상황극을 하듯 대쉬하는 건 이 영화의 얼마 없는 매력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연락처 교환도 없이 내일 저녁 7시에 에펠탑에서 만나자는 주인공의 제안은 로맨틱하지만 이메일 주소만 알면 어디에서든 연락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이해되진 않는다. 볼을 맞대는 프랑스식 인사법 비주(bisou)를 착각하여 키스를 한다는 설정은 귀여운 실수라기 보다는 요즘에는 성감수성 문제로 지적 받기 딱 좋다. 이국에서의 사랑이 꼭 현실적일 필요는 없지만 보는 관객에게 최소한의 이해와 공감의 여지는 필요하다.


<비포 선라이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그런 점에서 1995년에 개봉한 <비포 선라이즈>에서 남자 주인공 제시가 건넛자리에 앉은 셀린에게 말을 걸까 머뭇거리고 되도 않는 농담으로 헛발질하고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 망설이다 비엔나에서 하루를 보내지 않겠냐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장면은 훨씬 공감되고 매력적이다. 열차 테이블에 앉은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은 특별할 게 없지만 대화를 하다 말이 끊겨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색하게 웃는 둘의 모습에서 관객은 이국에서에서 만나는 인연이 어떤 매력일지 별다른 설명 없이 이해된다. 이야기의 힘은 해가 지는 몽마르뜨 언덕보다 흐린 날씨의 비엔나가 훨씬 로맨틱하게 만드는 것이다.  로맨틱하게 만드는 건 배경 자체가 아니라 채워지는 스토리다.



3. 새로운 경험을 통한 깨달음



 이야기의 말미에서 파텔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하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의 도움으로 빼앗긴 돈가방을 다시 되찾는다. 그런데 거기서 갑자기 난민캠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꿈을 물어보고 거기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나눠준다. '돈을 꿈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라는 메시지는 훌륭하지만 그 메시지로 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다. 복선이라 할 만한 건 초반부의 인도의 빈민촌에서 이케아 매장에 가는 걸 꿈꾸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겠지만 과연 영화 전반적으로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표현되었나 싶으면 의문이 든다. 그러기엔 주인공은 파리에서의 운명적인 사랑도 해야 하고 로마에서 만난 유명 여배우의 첫사랑도 이뤄줘야 한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얻은 깨달음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벤 스틸러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훨씬 더 심플하다. 무기력한 일상의 주인공이 어둡고 좁은 현상실에서 모험을  결심하고 공항에서 그린란드행 비행기를 타는 과정에서 영화는 주인공이 지나가는 길의 광고 문구를 결합해 하나의 메시지를 만든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썸을 타기도 하지만 메시지 전달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방구석에서 상상만 하는 월터가 직접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몇 십년 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과감함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깨달음을 공감할 수 있다.


 영화에서 깨달음이나 메시지를 주려면 내용을 통해 관객의 이해와 공감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은 그렇게 못 했다.




 편의점 PB상품으로 나오는 유명한 식당의 제품들은 (예를 들면 신당동 떡볶이, 교동반점 짬뽕) 그 맛을 흉내내긴해도 그대로 재현하진 못 한다. 시간을 들여 그 식당에 가서 먹는 게 훨씬 낫다. 이 영화도 그렇다. 지난 명작을 찾아볼 시간이나 여유는 없고 적당히 집 앞에 편의점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한 감동을 원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그게 이 영화를 추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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