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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Aug 06. 2019

새벽 1시와 2시 사이에 혼자인 시간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

AM 1:04

 새벽 1시가 좀 넘었을까, 놀러 왔던 친구들은 돌아가고 혼자 남았다. 내일 아침도 출근이지만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직 졸리진 않았다. 지난주에 새로 산 스피커로 Paris Match 노래를 들었다. 부드럽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보컬이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사실 일본 가수다. 친구들이 있었을 때 일본 가수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요즘 시기에 괜히 이런 걸 트냐고 타박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어쩌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아직은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긴엔 애매한 정도의 관계다. 뒷정리를 하고 간 덕분에 혼자 남아 쓸쓸하게 설거지를 할 일은 없었다.


AM 1:12

 오늘 낮에는 러닝 머신 위에서 20-30분씩 띄엄띄엄 보던 '비포 선라이즈'의 결말을 봤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비엔나에서 로맨틱한 하루를 보낸 젊은 연인은 6개월 뒤를 기약한다. 그 6개월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떠나기 직전의 기차 앞에서 자정 전과 자정 이후의 날짜를 따지고 있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면서 보는 영화는 소파에 누워 맥주를 마시면서 보는 것보다 죄악감이 덜 했다.


AM 1:20

 어두운 밤 소파에 누워 TV로 '비포 선셋'을 봤다. 간절해 보였던 연인은 시간이 지난 후 파리에서 만나 6개월 뒤에 약속 장소로 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입가에 새겨진 주름만큼 비겁한 어른이 된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여자가 가지 않았다고 먼저 말했고 남자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뒤 자기도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순한 대화지만 그것만으로 둘 사이의 긴장감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내 남자는 갔었다는 걸 들켜버린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고양이가 소파 위로 올라왔다.


AM: 1:30

 고양이의 탈을 쓴 강아지 같은 녀석은 소파에 누워 있으면 어느새 옆에 와서 눕는다. 가끔 배를 드러내어 눕는데 그게 퍽 귀여워서 그 배를 문지르고 있으면 마치 삶의 정수가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고양이 배의 촉감은 등의 털과는 또 달라서 말랑말랑한 살의 부드러움이 털로 살짝 덮여 있어 문지르면 무척 기분이 좋다. 배를 만지는 걸 허락하는 고양이는 많지 않은데 나의 동거묘는 기꺼이 배를 내민다. 소파 끝에 걸터앉은 고양이는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TV에 비친 파리의 거리를 보고, 파리의 거리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제시(에단 호크)는 셀린(줄리 델피)을 보고, 셀린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시선을 어디에 둘까 고민하고 있다. 현실에서 영화 속으로 이어지는 시선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AM 1:45

 자식도 없이 고양이와 함께 사는 독거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에 봤던 어느 유럽 작가 소설이었다. 프랑스? 아니 독일이었나? 그 책을 읽을 즈음에는 되게 외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내 미래가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노년이 과연 외롭기만 한 걸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만큼 생각은 바뀌어 있었다.


AM 1:57

 만일 누군가 시끌벅적함과 고적함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기꺼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 고적함 속의 나는 고양이의 배를 쓰다듬고 소파에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있다. 과연 그런 삶이 즐겁냐고 누군가 반문할 수 있지만 삶이 즐거운지 아닌지의 평가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거기엔 객관성은 필요 없기에 타인의 평가 따윈 가볍게 무시해도 된다. 영화 속 제시와 셀린은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를 세심히 바라본다. 마치 상대의 숨소리에 이 세상의 비밀이 숨겨진 듯이. 그런 시간 속에 해는 점점 저물어간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이었나, 시각은 어느새 새벽 2시가 가까워졌다. 나는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지만 거기에 대한 응답은 내일의 나의 몫이다. 전화벨은 30초쯤 울리다 멎었다.  


 전화벨 소리가 멎는 순간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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