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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Dec 02. 2019

상실을 복원하는 과정을 보고 싶다면

<중경삼림>, 왕가위


 같은 영화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특히 그게 잘 알려지지 않은거면 더욱 그렇다. 마치 마블 영화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오는 설렘이 좀 더 특별한 것처럼.


 여자친구와 헤어진 다음 날 <중경삼림>을 봤다. 이제는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언젠가 친구의 여자친구 인생영화가 <중경삼림>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제는 친구의 전여친이 되어 버려서 만날 일도 없지만.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든, 어디에 살든, 심지어 다른 나라 사람이고 언어가 안 통해도 그가 '<중경삼림>을 정말 좋아한다'라는 말을 한다면 두 시간 정도는 쉼없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 반환되기 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1994년에 개봉했다) 동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묘한 이미지가 구현되었다. 홍콩 밤거리의 진한 네온사인과 유난히 파란 하늘의 대조는 그곳이 이 곳이 아닌 어딘가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두 이야기는 배경만 같을 뿐 별개의 이야기다. 하지만 둘 다 실연을 당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마치 한 주제로 이어진 연작 소설 같다.

 

 실연이란 말을 되새겨 보면 이는 깊었던 관계의 갑작스런 상실이다.  아픔은 마치 3천 개쯤 되는 직소퍼즐을 간신히 완성했는데 벽에 장식하려는 순간 떨어트려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다시 차분하게 퍼즐을 붙이기 시작하지만 누군가는 허망함에 빠져 흩어진 퍼즐조각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한다. <중경삼림>은 그런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마주하는 과정을 그렸다.



 두 에피소드 중에서 좀 더 끌리는 건 두 번째다. 양조위가 맡은 경찰 663은 연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들은 뒤 집 안 물건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에게 집은 헤어진 연인과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다. 항공사 승무원이었던 그의 여자친구는 그의 집 열쇠를 돌려주면서 이별을 통보한다. 관계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서 그는 물건 하나하나가 마치 사람인 양 말을 건다. 축축해진 수건에 왜 우냐고 하고 오래 써서 쪼그라든 비누에게는 왜 이렇게 말랐냐고 한다. 실연한 뒤 질질 짜기보단 남겨진 물건들에 자신을 이입하며 위로하는 듯한 그 장면은 퍽 사랑스럽다.


 그런 그의 집에 한 여자가 몰래 들락거린다. 그녀는 그가 자주 가는 핫도그집의 점원이다. 그의 전여친이 편지와 키를 핫도그집에 맡겼고 마침 그걸 받은 건 그녀였다. 가게 안에 언제나 <California Dreamin'>을 틀어놓는 그녀는 키를 돌려줄 생각은 안 하고 언젠가부터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을 몰래 들락거린다. 청소를 하고 흰색 곰 인형을 호랑이 인형으로 바꿔 놓고 어항 속 물고기를 다른 종으로 바꿔 놓는다. 생수병에 수면제를 타기도 한다. 그는 집에 돌아올 때 마다 무언가 위화감이 들지만 알아채지 못 한다. 그저 흰색 곰이 누런 호랑이로 바뀐 걸 보고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 라고 하고 물 한 잔 마신 뒤 식탁에 엎드려 잘 뿐이다.

 


 소중했던 누군가를 잃은 자신을 집으로 비유하면 집 안에 물건을 새로 채우는 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다. 발랄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의 스토킹은 맥락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해서 마치 꿈 속에서 봤던 장면 같다. 그런 장면 속에서 뮤직비디오 같이 <몽중인>이 흘러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 노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귀여운 스토킹을 하는 여주인공이 직접 부른 노래다. 마치 달콤한 꿈 속에서 깰 생각이 없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 겉은 청량한 멜로디가 귀 속에서 퍼진다.

 

 <중경삼림>은 영화적인 영화다. 모든 장면과 대사에 인위적인 맥락을 부여하기 보다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만한 여지를 남겨둔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외투를 입기 시작할 무렵에 연인의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사람이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 그 상실감에 어찌할 줄 몰라 추운 겨울에 허공에 맨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영화는 '나도 그렇다'라는 말을 하면서 다가온다.



 관계의 상실을 복원하는 과정은 상실의 대상에 남은 말이 '왜?'에서 '그랬구나'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관계의 상실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매번 겪을 때마다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그 힘듦에 익숙해지는게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연령상으로는 어른이 된 지금도 상실감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만일 상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때가 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씁쓸한 일이다.


 놓친 인연아파하는 모든 이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주인공들이 각자의 상실을 극복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경험은 내가 겪었던 상실이 특별하지만 어쩌면 가장 보통의 경험일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 상실 속에서 꺾였던 감정이 온전히 복원되었을 때 나는 나를 좀 더 좋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런 확신이 생겼다.


 당신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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