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obinsoon
Aug 23. 2019
추석 연휴에 부모님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아들 집에 왔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온 뒤 처음이었다. 직업 특성상 추석 연휴에도 하루밖에 쉴 수 없어서 직접 와 주었다. 도착한 건 오후 두 시쯤이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3층에 올라왔다. 신축 아파트라 1층에서 벨을 한 번 누르고 현관 앞에서 한 번 더 눌러야만 한다. 이 집에 들어온 지 1년이 좀 넘은 터라 익숙하지만 가족이 방문하니 느낌이 좀 달랐다. 택배 아저씨에게는 진작에 오픈된 1층 현관 비밀번호를 어머니가 모른다는 건 당연하지만 어색했다.
어머니는 작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현관에 들어섰다. 식탁 위에 놔둔 뒤 소파에 앉아 집을 둘러봤다. '집 되게 좋다'라고 했지만 '낯설다'라고 들렸다. 갑자기 매일 지내는 이 집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키우는 고양이인 꿍꿍이만이 익숙한 듯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 무릎에 올라앉아 몸을 부비부비댔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디귿자의 깔끔한 키친이지만 딱히 집에서 요리를 해 먹진 않아 냉장고에는 계란, 주방 서랍장에는 참치캔과 레토르트뿐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스시집을 미리 알아놓았지만 그 대신 어머니는 아이스박스에서 찬거리를 꺼냈다. 거기에는 간단한 밑반찬과 된장과 미리 썰어놓은 파가 있었다. '너 좋아하는 된장찌개 해주려고 가져왔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남들이 집밥, 엄마 밥 말할 때 사실 공감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집을 나온 지 어언 10년이지만 딱히 집밥에 대한 그리움은 크지 않았다. 파스타보다는 기사식당의 백반정식을 훨씬 아끼는 한국 입맛인데도 말이다.
집을 나온 뒤 깨달은 건 어머니는 못하는 편이었다는 점이다. 간이 불안정해서 지나치게 짜거나 아니면 싱겁게 하는 편이었고 무슨 고집인지 모든 국물 요리에 큼직한 멸치를 통으로 집어넣었다. 덕분에 국 요리를 먹을 때마다 멸치부터 건져내는 습관이 생겼다. 어쩌다가 깍두기 국물에 카레를 섞는 식의 이상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음식을 크게 가리지 않는 편인 나는 별 탈 없이 먹고 자라 키도 쑥쑥 컸지만 맛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집밥 하면 형이 한 요리가 더 기억에 남았다. 중학교 이후로 2년에 한 번 꼴로 몇 달씩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어머니 덕분에 요리는 형의 몫이었다. 참고로 청소와 뒷정리는 나의 몫. 형은 꽤 요리에 욕심이 있는 편이라 부대찌개를 해달라고 하면 무즙부터 만들어서 국물을 시원하게 내는가 하면 떡볶이 하나를 만들어도 단맛과 매운맛을 적절하게 조합해 커다란 대접에 한 걸 하루 만에 다 먹기도 했다. 군대에 있을 시절에 집에 전화를 해도 '뭐 먹고 싶냐'라는 말은 어머니가 아닌 형이 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니 나에게 '집밥=엄마 밥'이라는 공식이 통하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가 해주는 된장찌개는 예외였다. 종종 본가에 내려갈 때 어머니가 '뭐 먹고 싶어'라고 물으면 라면이나 된장찌개를 말했다. 고깃집에서 서빙 일하면서 가져온 1인용 뚝배기에 된장과 애호박, 넉넉히 넣은 찌개용 두부, 청양고추와 가끔씩 양송이버섯을 넣고 마지막으로 쇠고기 다시마, 그러니까 MSG를 아끼지 않고 넣어 만든 된장찌개는 기본적으로 고깃집 된장찌개와 비슷한 자극적인 맛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좀 더 넉넉히 들어간 야채와 살짝 더 자극적인 된장찌개는 내 입이 기억하는 유일한 엄마표 요리였다.
밥공기에 캔참치를 넣고 거기에 계란 반숙을 얹어둔 뒤 된장찌개를 숟가락으로 퍼 담아 먹으면 평소에 밥 한 공기 겨우 먹는 나도 밥 두 공기는 거뜬히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 뚝배기 하나를 딱 비운다. 냉정하게 따지면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백종원표 된장찌개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분명 다른 맛이었다. 된장도 매번 달라 맛은 조금씩 다르지만 분명 어머니만의 맛이 있었다.
그날도 정확히 두 공기를 비웠다. 비운 그릇 너머에는 넉넉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넉넉하지만 약간 힘이 없는 웃음이었다. 매일매일 식단을 신경 써야 되는 당뇨병과 10분만 걸어도 땀을 비 오듯이 흘릴 정도로 약한 무릎 관절, 거기에 십수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과 조증,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아픈 게 많은 분이었다. 집 밖을 자주 나가라고 하거나, 친구 좀 사귀시라,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라는 잔소리를 해도 어차피 집 나간 아들이 하는 말이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병명에 혹시 '(병을) 모으고 있는 거냐'라는 불효 막심한 소리나 하는 아들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굳이 내가 사는 곳으로 모신 것도 집에만 있지 말고 밖을 좀 돌아다니게끔 하고자 한 마음이었다. 식사를 한 뒤 아들이 일하는 극장에서 영화를 같이 한 편 보고 천안 시내를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어머니는 이내 같이 온 새아버지와 병천순대를 먹고 싶다며 나가셨다. 가끔씩 쿨한 부분이 있었다. 그 점에서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입원하고 뭐 기타 등등 불행의 요소가 많은 집안이었다. 영화로 만들면 배경이 너무 어두워서 상업용에는 부적합했다. 굳이 구분하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보다 살짝 더 비관적인 정도?
불행은 상대적인 거라서 마치 5단계의 매운맛이 있고 그 단계를 구분하듯 불행을 구분할 수 있다고 치자. 중요한 건 몇 단계냐가 아니라 내가 소화해낼 수 있느냐다. 그래서 내가 4단계의 매운맛을 먹고 다른 사람이 1단계의 매운맛을 못 먹는다 해도 그 사람이 불행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사람 나름대로 힘든 시간일 수 있다. 그 사람의 위가 매운맛에 단련되지 않은 거니까. 그저 내 위가 4단계를 견딜 수 있다는 게 다행일 뿐이다. 물론 어머니가 입원한 뒤 찾아오는 5단계는 좀 힘든 편이다. 병원에서 통원 진료가 필요한 정도? 그래도 어쩌겠나,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는 걸. 눈 앞에 있는 음식이 어떤 것이든 말이다.
집에서 먹는 게 집밥이라면 과연 그 집은 어떤 집인 걸까? 본가를 나온 지 10년이 넘은 나에게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사는 본가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 방은 창고로 변해있었고 새아버지가 들어온 후 집안 내부는 점점 낯선 물건들로 가득 채워졌다. 본가에 내려가도 이틀 넘게 자고 온 적은 근래에 없었다. 두 분의 공간에서 나는 외부인으로 느껴졌다. 그러니 나에게 내 집은 있어도 우리 집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날 먹었던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분명 집밥이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재료는 된장과 청양고추와 채 썬 파뿐이었고 다시마와 두부는 집 앞 슈퍼에서 내가 사 왔다. 참치와 계란 프라이 역시 내 집에 있던 거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만든 그 적당하게 짭조름한 맛은 분명 집밥의 맛이었다. 익숙함을 주재료로 한 안정감이라는 맛이었다.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집밥의 집은 부모님이 사는 집도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신축 아파트도 아니다. 제일 근접한 건 무릎이 아파서 10분도 못 걷는 어머니가 들고 온 아이스박스 아니었을까. 덕분에 본가에서 한 시간이 걸려도 재료가 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두 시간 남짓 머물렀던 부모님이 떠난 뒤 설거지를 끝내고 배가 부른 나는 소파 위에 누워 낮잠을 잤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가득한 꿀 같은 낮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