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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23. 2016

My New Partner

유이, 혹은 꿍꿍이

 친한 친구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적 이혼 후 영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터를 잡고 살고 있. 작년 여름, 처음으로 영국을 간 친구는 어머니와 재혼 상대(영국 사람)의 집에서 한 달 간 머물렀는데 퍽 괜찮았다고 한다. 사는 지역은 머스(Bournemouth)라고 런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다. 바다가 근처에 있고 시가지도 적당히 발달해 정신없는 런던보다 오히려 낫다고 했다. 재혼 상대와도 썩 괜찮게 지냈다 한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국 가족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녀석은 그 남자 분을 어머니의 '파트너(partner)'라고 칭했다. 두 분이 아직 정식으로 결혼은 안 해서 정확히 말하면 동거인에 가깝기에 그렇게 칭한 더랬다. 파트너라는 말은 영어라서 그런 지 동거인보다 더 건실하고 중립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올해 여름에 두 분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해서 친구도 다시 갔다 올 예정이란다. 어머니의 결혼식에 가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지만 당장 여행 갔다 올 형편은 안되기에 대신 귀국 길에 면세점에서 보드카 한 병을 부탁했다.


 아무튼 이와는 별개로 한 달 전, 나한테도 파트너가 생겼다.


얼굴색이 어두워 사진으론 녀석의 풍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냥 내가 사진을 잘 못 찍는 걸지도.

 

 3살, 샴고양이, 암컷이지만 중성화 수술을 했다. 원래 다른 집에서 키우던 걸 올해 초 어머니가 떠맡게 되었다. 이전 집에서 지어준 이름은 '유이'. 이름을 불러도 별 반응이 없고 "유이야" 하는 게 어감이 이상해서 멋대로 '꿍꿍이'라고 부른다. 울 때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작게 꿍꿍 거리길래 지어 준 별명이다.


우리 집에 오기까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나와 함께하기까지 녀석은 꽤 여러 집을 전전한 모양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임산부가 있는 가정집에 입양된 녀석은 아이가 출산되자 신생아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친척이 일하는 공장으로 옮겨졌다. 한동안 거기 있다가 어떻게 다른 가정집으로 옮겨졌는데 거기서는 또 그 집 아들내미가 고양이 털 알러지가 있어 그 집 아버지가 내보내라 했단다. 그러다 어머니가 다니는 성당 모임의 반장이 그 집과 연이 있었는데 마침 우리 집(본가)이 이미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걸 알고 어머니에게 키울 수 있는지 제안했다. 어머니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미 다섯 마리나 있던 우리 집에 녀석이 들어왔다. 10년 가까이 2마리만 키우다가 요  1, 2년 간 이런 식으로 주위의 외면받는 고양이들의 종착점이 된 울 엄니였다. 원래 있던 녀석들이 이빨 빠질 정도로 늙어버린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게다. 동물을 안 키우다가 키우는 것보다 키우는 상태에서 더 데려오는 게 확실히 수월한 편이어서 그런지 다른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떠맡아 달라는 부탁이 왕왕 있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키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떠맡기는 사람들도 싫었고 그걸 다 받아주는 어머니한테도 매번 전화로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래 봤자 집 나온 지 7년이 돼가는 아들내미의 말은 어머니한테 그리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우리 집(본가)에 온 꿍꿍이는 다른 고양이들과 그리 잘 어울리지 못했다. 따로 종이 없는 다른 녀석들(코숏이라고 한단다)은 홀로 품종 묘인 녀석과 묘한 거리감을 두었다. 특히 그중 한 마리는 녀석을 심하게 괴롭히기도 했다. 다른 녀석들은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녀석과는 영 어울리지 못했다. 무리에서 조금 겉도는 꿍꿍이었다. 가끔 본가에 내려가 보면 녀석이 홀로 캣타워 꼭대기에 누워 있는 걸 자주 보았다. 밥 먹을 때도 눈치 보면서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조심스럽게 사료를 씹고 삼켰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작년부터 자취를 시작한 내가 요 근래 집에만 있으면 자주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한 마리 데려다 키우는 걸 제안했다. 혼자 살기에 자주 돌봐주지 않아도 되고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는 놈을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꿍꿍이를 데려오게 되었다. 그렇게 녀석은 대학가 구석에 있는 내 원룸으로 왔다.



 대학 입학하면서 집을 나온 뒤 7년 만에 다시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내 방에 처음 발을 들인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침대 밑에 들어가 숨더니 30분쯤 지나자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침대 위, 카펫이 깔린 바닥, 식탁 위로 조심스럽게 자기 구역을 넓혀갔다. 요즘에는 내가 공부하는 의자에 앉는 걸 좋아하는데 시험기간 때 공부하다가 잠시 쉬려고 물 한 잔 마시려 일어서면 잽싸게 의자에 올라 드러누워 조금 곤란케 했다.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 조만간 밤 산책을 시도해 볼까 한다.


 프로눈치러

 녀석은 도도한 고양이의 특징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위 눈치를 많이 살핀다. 아마 거듭된 입양으로 인해 생긴 습관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초등학교 5, 6학년쯤의 아이가 입양된 모습을 상상하면 비슷할 듯 싶다. 그 집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자신에게 오는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입양된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아니면 최소한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애 같지 않은 행동을 한다. 주위를 살피고 정해진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집에서 나고 자란 고양이들이 밤만 되면 우다다 거리며 자고 있는 내 배 위에서 UFC를 찍는 것과 대조적으로 녀석은 정말 얌전하다. 어디든 누울 곳만 있으면 몸을 둥그렇게 만 상태로 눕다가 얼마남지 않은 본능에 다라 발톱을 간다. 오직 사다 준 스크래처에다가만. 본가의 거실 벽지가 발톱 자국으로 사방천지 뜯어진 것과는 천지차이다. 집안을 뛰어다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료나 물이 떨어졌을 때,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방음이 약한 원룸 벽을 절대 통과 못할 작은 소리로 꿍꿍거린다. 사람과 살기 위해 최적화된 녀석이다. 자신의 본능을 최대한 인간에게 맞춰 온 꿍꿍이를 보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인다.


 근래 하나 발견한 사실은 녀석이 봉을 무척 무서워한다는 점이다. 꿍꿍이를 데려오면서 털 청소를 자주 하기 위해 봉걸레 세트를 하나 샀다. 헌데 녀석이 허리까지 오는 긴 걸레봉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침대 밑으로 도망가는 게 아닌가. 우리 집에 와서 처음으로 뛰어다녔다.

 본가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고양이를 혼낼 때가 있는데 바로 사람을 공격할 때다. 그럴 때면 빈 페트병으로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린 뒤 그 다음부터는 잘못을 했을 때마다 페트병으로 바닥을 친다. 그러면 파블로프의 개와 비슷한 원리로 텅텅거리는 페트병 소리만 듣고 무언가 잘못 했음을 깨닫고 하던 행위를 멈춘다. 아무래도 꿍꿍이에겐 그 페트병이 걸레봉인 듯 싶다. 녀석이 작은 소리로 꿍꿍거리며 울거나 눈치보는 듯한 행동하는 건 어쩌면 걸레봉과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어떤 공장이든 걸레봉 두세 자루 정돈 있을 테니까.


 그러나 어제 저녁, 청소를 위해 다시 걸레봉을 들었을 때 의자에 앉아 있던 녀석은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이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 밑으로 도망 간 건 대체 뭐였을까.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한 행동에 대해 지나친 의미 부여와 상상력을 발휘한 건 아닐까. 만일 그런 거라면 맘에 걸리는 무언가가 조금 덜어질 듯 하다.


 어찌 됐든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의 꿍꿍이에게는 걸레봉이든 빈 페트병이든 필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함께 살면서 쌓아가는 작은 변화

 파트너는 독립적인 개체이면서 나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세한 습관들이 꿍꿍이가 오면서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잘 안 넘어진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넘어질 뻔한 적은 종종 있지만 비틀거리다가도 이내 균형을 잡는다. 고양이는 공간만 있으면 집안 아무 데서나 눕는다. 화장실 문 앞에서부터 거실 한 가운데까지. 그러다 보니 집안을 걸어 다닐 때 넋 놓고 있다가는 쉽게 발로 치게 되는데 또 그러면 득달같이 달려든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걸어 다닐 때 의식적으로 발끝을 신경 쓰면서 걷게 되는데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져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진다. 그렇게 발끝을 신경 쓰면서 조심스럽게 걸으니 넘어질 일이 거의 없는 거다.

하고 싶은 말 있음 해봐, 이 누나가 들어줄텡게.

 꿍꿍이가 온 뒤부터는 혼잣말이 늘었다. 꿍꿍이한테 하는 말이지만 대답도 없고 듣는 시늉도 안하니 혼잣말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힘들었어' '배 고프다' '꿍꿍꿍꿍꿍' '야, 꿍꿍거리지 말고 가끔은 멍멍 해봐, TV에 나가서 돈 좀 벌게.' 사람한테는 해봤자 멍청하단 소리밖에 들을 일 없는 말들. 집에 오면 의자에 앉고 녀석은 무릎 위에 올라온다. 턱을 긁고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오늘 있었던 일, 갑자기 생각나는 말 아무거나 지껄인다. 그렇게 녀석은 취업을 앞둔 내 고민, 작년에 만났던 여자, 어제 친구와 대화 중에 맘에 살짝 걸리는 단어 같은 걸 듣는다. 항상 10분 정도 그렇게 앉다가 질리면 다시 딴 데로 간다.


 청소도 자주 하게 되었다. 집에 오면 우선 빗자루로 쓸고, 정전기 걸레로 털을 최대한 없애고, 마지막으로 물걸레 청소를 한다. 아직도 침대 밑에 왕왕 들어가기에 조만간 이사 온 지 처음으로 침대를 드러내어 먼지를 다 빼려고 한다. 최근엔 화장실에도 자주 들어가기에 물기 제거를 제대로 안 하면 발바닥이 홍건하다. 젖은 발바닥으로 침대며 의자며 묻히기에 화장실 청소도 자주해야 한다. 식솔이 늘어났음에도 우리집은 이전보다 깔끔해지고 있다.




 정체성은 나를 다른 이들과 구분해주는 특성이다. 고양이와 오랫동안 살았던 경험을 통해 잘 안 넘어지는 내가 되었고 꿍꿍이가 온 뒤로 이전에 안 하던 혼잣말을 하고, 이틀에 한 번은 집안 청소를 하는 내가 되었다. 그렇게 녀석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나의 정체성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러니 녀석은 내 애완동물도 아니고 반려동물도 아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기에 서로 맞춰갈 수밖에 없는 파트너다.


 무릎에 앉은 녀석은 삼십 분쯤 지나자 기지개를 켜고 내려갔다. 무릎에 남은 온기가 서늘해진다. 그래도 억지로 다시 올려놓지 않는다. 다시 앉길 기다릴 뿐이다. 파트너는 강제가 아닌 존중의 대상이다.



 잘 지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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