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시작

<엔딩스, 비기닝스>, 드레이크 도리머스

by Robinsoon


스포일러 정도 - ★★☆☆☆

★ - 가벼운 인물 소개
★★ - 전반부 스토리
★★★ - 결말 직전까지
★★★★ - 결말이고 반전이고 전부 다
★★★★★ - 시리즈물일 경우 전작 후속작 가리지 않고


자기 이름을 딴 식물을 오른쪽 귀 아래에 문신으로 새긴 다프네(Daphne, 월계수)는 4년간 사귄 남친과 갑작스럽게 헤어지면서 비슷한 시기에 직장도 그만둔다. 그녀는 언니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거기에서 그녀는 전직 마성의 남자인 '잭'(배우 - 제이미 도넌, 대표작 - '그레이의 50개 그림자'의 그레이)과 전직 무쇠팔 군인인 '프랭크'(배우 - 세바스찬 스탠, 대표작 -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윈터 솔저)의 구애를 동시에 받게 된다.


둘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잭(Jack) - 책을 쓰는 작가이자 교수, 다프네의 언니의 집에서 열린 해피 뉴 이어 파티에서 그녀를 본 뒤 접근한다. 젠틀하고 배려심이 좋다. 금주 중인 다프네를 위해 무알콜 칵테일을 만들어주고 스킨십 진도를 나아갈 때는 그녀의 의견을 구한다. 개(犬)과 미남.

프랭크(Frank) - 직업 불명, 같은 파티에서 다프네를 처음 만났으며 만나자마자 작업을 건다. 유머러스하며 충동적이다. 처음에 그녀에게서 거절당한 후 바로 다른 여자에게 작업 들어간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다프네와 아이컨택하는 거 보면 선수일 가능성 높다. 하지만 우울한 그녀를 위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보내줄 정도로 센스가 좋고 적극적으로 대시하다가도 마지막엔 여지를 남겨놓는다. 마찬가지로 개(犬)과 미남, 잭이 진돗개나 셰퍼드 같은 듬직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달시코기 같은 귀염상 있는 개.


강아지 두 마리가 한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듯한 이 관계의 특징을 하나 더 하자면 잭과 프랭크는 친구다. 쀼의 세계의 막장스러움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영화는 막장극보다는 주인공인 다프네의 자아성찰에 집중하는 전개를 보여준다.


클로즈업이 잦아 얼굴 근육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연기 주문을 받았을 것 같은 그녀의 전반적인 정서는 방황이다. 직장과 연애, 두 영역에서 모두 안정성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방황이었다. 헐리웃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집 앞마당 수영장 위에 누운 채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앞에 두 남자는 다시 선택지를 건넨다. 누가 더 좋은데?


둘 다 좋은데 어쩌지? 입 밖에 내뱉으면 뺨 맞기 딱 좋은 이 말은 이내 그녀의 새로운 고민이 된다. 멀쩡한 친구 둘을 현피 뜨게 할 법한 그녀의 이 고민은 이제 극을 이끄는 주요 갈등이 된다. '여기 썅년 하나 추가요'하고 무시해버리기엔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녀의 고뇌는 전혀 이해 못할 것만은 아니다.



많은 이가 경험해봤을 것이다. 상반된 두 매력에 끌렸던 경험. 나의 예를 들면 그건 '남들 눈치 안 보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기도 하고 '언제나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사람' 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프네처럼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게 아닌 보통 전자와 사귀다가 헤어진 후 후지를 만나는 식으로 연애경험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다. 다프네의 경우 그걸 동시에 하는 거다. 거기다 그녀는 일과 연애가 최근에 끝났고 심지어 언니 집에 얹혀사는 입장이다 보니 주거도 불안정하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어려운 선택지가 주어질 경우 갈팡질팡하기 쉽다. 자존감이 낮아져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걸 골라도 고르지 않은 선택지를 뒤돌아 보며 후회할 수밖에 없는 상태. 만일 친구가 이런 상태에 빠졌다면 일부터 구한 뒤 언니 집에서 독립하라 할 것이다.



하지만 다프네는 두 남자 사이에서 허둥대기 바쁘다. 삶의 중심을 그녀에게만 맞출 것 같이 순애보스런 모습을 보여줬던 잭은 해외 연수가 결정되었다면서 '매달 만나러 와줄 거짘?'라는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고 자유로운 영혼인 줄만 알았던 프랭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자기 혼자 냅두고 친구랑 약 빨고 있는 노답력까지 겸비해 그녀를 질리게 한다. (여기 개새끼 두 놈도 추가요) 거기에다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느끼는 도덕적 회의감은 점점 더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영화에서 답답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는 그녀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잭과 프랭크는 감독이 의도한 듯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단면적으로 보면 잭은 정신적인 교감과 안정감을 주고 프랭크는 육체적인 욕구와 충동적인 끌림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선'이다. 모종의 이유로 사람과 거리를 두려는 다프네는 자신의 앞에 선을 그어두고 선을 넘으려 하는 사람들을 멀리한다. 잭은 대화와 교감을 통해 선을 좁히려 하지만 다프네의 허락 없이 넘지 않는다. 프랭크는 은근슬쩍 다리 하나를 선 너머에 두는가 싶다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다프네가 잠시 한눈 판 사이 거침없이 다가간다. 예를 들면 둘 다 다프네가 과거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눈치채지만 잭은 넌지시 물어본 후 다프네가 대답하는 걸 원치 않자 더 묻지 않았지만 프랭크는 다프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프네가 습관처럼 그리는 그림책을 훔쳐본다.


하지만 다프네 자신도 상대가 선을 유지할지, 아니면 그 선을 넘어 자신에 더 가까이 와줬으면 하는지 본인도 잘 모른다. 아니면 애초부터 그 선이 왜 있는지부터 고민해야 할런지 모른다.



영화는 연애담을 주로 다루지만 뒤로 갈 수록 다프네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과정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더 가깝다. 잭과 프랭크 과연 누가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사랑이 아닌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지를 관찰하면서 영화를 보면 몰입이 쉬워지고 영화의 메시지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거기에 현실적인 연애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연출은 작품을 거듭할 수록 간결해져 누구든 공감하기 쉽게 실제와 같은 연인의 모습을 그린다. 다프네가 잭과 프랭크와 주고받는 문자는 화면 전체에 낙서처럼 휘갈겨지는데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썸탈 때 하는 카톡처럼 1이 사라지는 타이밍을 두고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대 초반에 했어야 하는 고민을
지금 하고 있어요.


다프네가 잭과의 첫 데이트에서 했던 대사인데 정말 공감이 갔다. 20대 초반은 성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을 때인데, 극 중 다프네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다. 의도치 않게 삶을 리셋하게 된 다프네는 다시 시작해야하는 대내외적 압박을 받는다. 작금의 현실은 그녀에게는 눈앞에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것 같았던 20대 초반과는 다르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일이든 인간 관계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녀는 쉬이 나아가지 못 한다. 결국 2시간이란 러닝 타임 동안 영화는 살면서 느끼는 필연적인 압박감을 피해 가지 말고 마주한 채 자신이 내딛을 수 있는 만큼의 걸음을 내딛으라고 하는 듯하다.


그러니 의도치 않게 삶의 전환기를 맞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빨리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조급해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퇴사를 했거나, 오랫동안 사귄 연인과 헤어졌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내적인 이유 때문에 지금의 삶을 180도 바꿀 필요가 있거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나 언급하면 다양한 인디 팝 음악이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데 그 노래들이 퍽 매력적이니 출중한 사운드를 느끼고 싶으면 극장으로 가시길. 한 곡 고르자면 The Mary onettes의 'The Night Before the Fu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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