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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l 05. 2021

그들에게서 당신을 찾을 무렵에는

<500일의 썸머>, 마크 웹

※ 이어지는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리뷰 말고 무비 에세이


 벌써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를 봤다. 10년 전 처음 봤을 때 이해 못할 나쁜 년이었던 썸머의 마음이 이제는 이해가 되고 두 번째 봤을 때 한심한 모지리 같던 톰이 한 때의 내 모습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재기 발랄한 연출과 감성을 툭 건드리고 훌훌 가는 듯한 OST가 그리워지면 영화를 다시 본다. 몇 번이나 봤던 영화지만 언제나 푹 빠져서 보게 된다. 화면에는 어느새 엔딩크레딧이 흐른다.


 <500일의 썸머>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사람과의 기억을 시간이 지난 후 되짚어 보면서 스쳐간 인연이었음을 인정하는 과정을 그렸다. 떠오르는 기억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비관적이지만 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실제 경험은 너무 비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낭만적이지도 않다. 밝은 아이보리 톤으로 채색된 기억은 톰의 어른스러운 동생의 조언을 계기로 무채색의 건조함 역시 품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여자가 오빠 운명의 짝이었단 생각은 그저 착각일 뿐이야.
좋은 것만 기억하는 것도 문제야.
다음에 그 여자 생각할 땐 나쁜 기억도 떠올려봐."


 그렇게 떠오르는 썸머와의 기억 속에는 로맨틱한 이케아 데이트와, 맑은 날 오후에 공원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때도 있지만 그런 기억들 틈새에는 식당에서 서로의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채 허공에 대고 대화하는 모습과, 같은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썸머와 그런 썸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 모습도 있다. 결말 부분에 이르러 톰은 깨닫는다. 썸머가 자신의 운명이 아니었음을.


Time it was and what a time it was, it was,

A time of innocence a time of confidence.

그 시절은, 정말이지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순수함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시절이었죠.


Long ago it must be, I have a photograph

Preserve your memories, they're all that's left you

아주 오래전 일이었고, 지금은 사진 하나로만 남았어요.

추억을 간직하세요. 남은 건 그것뿐이니까요.


 썸머와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의 배경에 깔리는 음악은 사이먼 가펑클의 'bookends'다. 가사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지만 멜로디는 어딘가 쓸쓸하다.

 

 썸머는 톰에게 있어 첫사랑일 지 모른다. 첫사랑은 단순히 순서로 정해지는 게 아닌 이후의 연애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줘야 한다. 앞으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계속 머릿속에서 비교 대상이 되는 사람, 시간이 지나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 사람, 처음으로 진심을 다했던 사람이다. 어텀(Autumn)을 만나면서 새로운 1일을 맞이한 톰이지만 새로운 관계에서도 썸머는 불현듯 기억에서 튀어나와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첫사랑은 이후의 나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주는 원형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나의 연애는 좀 더 성숙해질 수도, 과거에 질질 끌려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했던 기억이 있다면 끝이 어떻든 그건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건 최근의 일이다. 지금은 영화 속 톰과 썸머가 한 때 내 모습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10년 넘게 함께한 영화를 다시 보면서 조금은 나아진 나를 되돌아본다.



관련 주제로 무비 살롱을 진행했습니다.

CINEEND X 남의집 프로젝트 in 2021. 6.20 15:00

https://naamezip.com/detail/9664


다음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CINEEND X 남의집 프로젝트 in 2021. 7. 9 19:00

https://naamezip.com/detail/9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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