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밑줄 치는 습관에 관하여
<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by Robinsoon Sep 20. 2021
책을 읽을 때 인상 깊은 부분이 있으면 밑줄을 친다. 그리고는 다시 읽을 때 그 부분부터 읽는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앞뒤 맥락 없이 밑줄을 친 부분만 읽으면 이해가 안 갈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밑줄 친 부분을 포함하는 챕터 전체를 읽는다. 이 습관이 생긴 뒤로는 도서관보다 서점을 가는 때가 많아졌다. 덕분에 읽은 책을 알라딘 중고마켓에 파는 건 불가능해졌다. 알라딘에서는 밑줄 친 장수가 다섯 장을 넘기면 팔 수 없다. 책을 매입하는 직원이 휘리릭 넘겨서 확인하기에 잘하면 속여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6년 전쯤이었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돈이 없어서 책장에 있는 책 중에 몇 권을 판 적 있었는데 연필로 밑줄을 그은 책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직원은 대충 확인했었는지 들키지 않고 좋은 값에 팔렸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받은 돈은 목 마른 자를 위한 한 방울 이슬처럼 쏠쏠하게 썼다.
간밤에 책을 읽다가 별 거 아니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몇 년 전 읽었던 통속적인 연애소설을 꺼내 읽었는데 밑줄 친 곳이 딱 한 부분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쉽게 읽히는 책을 찾던 때였다. <동경만경>이라는 이 책은 육체노동을 하는 남자와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여자의 가벼운 연애담을 다뤘다. 한 번 읽고 다시 읽진 않았다. 작가는 요시다 슈이치.
책장에서 다시 꺼낸 그 책의 밑줄 친 부분은 이런 게 적혀 있었다.
'이번 주도 바빠?'라는 메일을 받고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회사에서는 마음 편히 메일을 쓸 시간이 나질 않았고, 집에 가서 쓰려고 해도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휴대폰을 열어볼 기력조차 없이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5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왜 이 부분에 밑줄을 쳤을까 의문이 들었다. 저 부분은 여자 주인공인 미오의 독백으로 원나잇 상대인 료스케의 연락에 무성의하게 답하는 부분이다. 맥락은 밑줄 친 부분을 포함한 단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5년 전의 나는 왜 이 부분에 밑줄을 쳤을까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하나의 가정을 해 보면 저 때의 나는 입사 초기 연장근무를 반복할 때라 집에 오면 씻고 잠에 드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점 때문에 공감 갔기 때문일까?'
호감을 가진 사람의 연락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미오가 괘씸하게 보여서였을까? 그렇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와 썸을 탔을 때 대부분 을이었으며 그렇기에 연락에 있어서도 먼저 하고 항상 답변을 기다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도 바빠?'라는 연락에 있어서 채근하는 듯한 카톡을 보내진 않았다. 쿨하게 보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나는 연락을 기다리는 료스케에게 공감을 했기에 밑줄을 쳤던 걸까?
결국 밑줄 친 부분을 포함한 챕터를 다 읽었지만 서른 셋의 뇌세포란 건 5년 전에 휘리릭 읽었던 책의 밑줄 친 이유를 떠올리기에는 부족했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추론을 통해 정리한 이유는 세 가지.
1. 그때의 나는 일상이 피로했기에 집에 와서 침대에 돌진하는 미오에게 공감했기에 밑줄을 쳤다.
2. 상대방을 떼어내지도 않고 답장을 늦게 하는 미오가 괘씸해서 밑줄을 쳤다.
3. 연애에 있어서 을의 위치인 료스케에게 공감해서 밑줄을 쳤다.
앞부분을 다시 읽다가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갔다. 다시 밑줄을 쳤다. 미오가 료스케를 떠올리면서 생각한 부분이다.
사실은 그가 단지 몸뿐이기를 바란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단지 몸뿐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5년 뒤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옛날에 읽었던 책의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으면 마치 과거의 나와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새로 알게 된 독서의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