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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Mar 20. 2022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업로드일 기준(22. 03. 20) 극장 관람객: 69,851명


아무도 없는 상영관 가운데 자리에 혼자 앉은 순간, 영화의 시작과 함께 러닝타임 세 시간이 무언가에 홀린 듯 순식간에 흘러갔다. 정적인 화면 구성에 인물 간의 대화가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는 지루할 것 같지만 몇몇 씬의 강렬함은 홀리듯 영화에 빨려 들어가게 했다. 중요한 장면에서 드러난 메시지들은 유기적인 연결성과 독립성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극장을 나온 뒤에 남아있는 묵직한 무언가가 있었다. 찜찜함과는 다른, 이를테면 물을 끓이는데 90도쯤에서 멈춰 속에서 보글거리듯 끓어오를 듯한 감정이 분출되지 않았다. 나머지 10도는 영화를 본  자신이 자가 연소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대사를 먼저 떠올리고 대화로부터 이야기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각본을 쓴다. 인물 간의 대화를 되새겼다.



1. 가후쿠 유스케와 가후쿠 오토의 대화


오늘 돌아오면 얘기 좀 할 수 있어?
물론이지, 왜 일부러 그런 걸 물어?


연극을 연출하고 연기도 하는 가후쿠 유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와 TV 드라마 각본을 쓰는 가후쿠 오토(키리시마 레이카)20년 차 부부지만 남편인 유스케가 출장을 간 당일 저녁에도 아내인 오토가 영상통화를 걸 정도로 소통이 활발한 편이다. 나누는 말에는 언제나 배려가 깔려있고 서로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 하지만 둘의 대화 사이에는 구멍이 있다. 갑자기 출장이 하루 연기되어서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스케는 오토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앞으로 나서기는커녕 빈집인 줄 알고 들어온 도둑이 안에 사람 있는 걸 확인하고 도망가듯 문 소리도 내지 않고 빠져나간 뒤 공항 근처 호텔에서 투숙한다. 오토 역시 유스케와 대화 장면에서 영혼이 없는 듯 인형 같은 톤으로 말하곤 한다.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다. 하지만 둘 다 그게 없는 척 서로를 대한다.



흥미로운 둘의 소통 방법이 있다. 유스케가 집필한 각본을 오토가 낭독하고 이를 녹음한 테이프를 유스케가 운전할 때 듣는 것이다. 유스케가 대사로 내뱉을 부분은 공백으로 남겨 놓아 유스케는 운전하면서 마치 아내와 연기 앙상블을 추듯 본인 차례에 대사를 읊는다. 아내의 대본 리딩은 아무런 감정이 실려있지 않고 거기에 맞추는 유스케의 리딩 역시 책을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스케가 차에서 대사를 읊는 오토가 죽은  영화 중후반부까지 계속 이어진다.


유스케는 이 행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아내와의 소통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 소통이 짜여진 틀에서만 이루어지길 원하는 바람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토가 중요한 고백을 위해 집에 일찍 와 달라고 한 날, 주차장 안에서 나오길 망설이며 테이프 속 아내의 목소리를 따라 대사를 왼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를 발견한 순간 유스케는 오토가 하고자 했던 말을 들을 기회를 영영 놓친다.



2. 가후쿠 유스케와 다카츠키 코우지의 대화


자네는 오토를 사랑했어
부정하지 않겠어요. 오토 씨는 멋있잖아요, 아주 많이.


유스케와 오토의 생전 내연남이었던 코우지(오카다 마사키) 대화다. 애초에 소통이 가능한 관계가 된 것 자체가 신기한 둘의 대화는 코우지가 유스케가 연출한 연극의 오디션에 참가하면서 이루어진다. 대본 리딩이 끝난 어느 날, 코우지는 유스케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한다.


대화를 통해 코우지는 자신이 오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유스케로부터 오토에 대한 얘기를 더 듣기를 원한다. 유스케는 처음에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조금씩 오토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녀가 죽기 직전 제일 가까웠던 사람이 남편인 자신을 제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내연남인 코우지이기에 그에게도 오토에 대한 가장 생생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대인 것이다. 유스케는 코우지를 통해 제 3자의 시선으로 오토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나아가 오토와의 소통에서 메꿔지지 않은 구멍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오토는 유스케와 섹스를 하고 나면 떠오르는 이야기를 읊는 습관이 있었다. 영화의 시작에서 막 섹스를 끝낸 오토가 좋아하는 남자의 방에 몰래 들어가 자위를 하는 여자 이야기를 하는데 이후에도 오토는 간헐적으로 이 이야기를 읊는다. 오토가 죽은 뒤의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는데 유스케의 차로 코우지를 데려다주던 때, 유스케는 코우지로부터 오토에게 듣지 못 한 이야기의 뒷부분을 듣는다.


유스케가 듣지 못했고 코우지가 들었던 이야기의 뒷부분은 공감받지 못하는 죄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죄를 저지른 건 분명하나 현실에서 이를 인정하는 건 죄를 지은 본인뿐이다. 코우지의 목소리로 듣는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오토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었던 유스케는 그들의 관계에 있었던 커다란 구멍을 다시 한 번 직시하게 된다.



3. 가후쿠 유스케와 와타리 미사키의 대화


너는 엄마를 죽이고, 나는 아내를 죽였어.


유스케의 운전기사인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 사이의 소통은 방향이다. 앞자리에서 운전을 하는 미사키는 유스케를 볼 수 없지만 뒷자리에 앉은 유스케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온전히 유스케의 편의를 맞추기 위한 공간인 차내에서 유스케는 목적지를 말하거나 가벼운 지시를 내릴 뿐 그 외의 대화는 하지 않는다. 미사키 또한 유스케에게 필요 이상의 소통을 시도하지 않고 운전기사로서 기능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소통은 시선의 변화에 맞춰 변화한다. 처음에 그들은 시선 교환 없이 목소리로만 소통한다. 무감정한 목소리에는 정보만이 담겨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극제 관계자인 윤수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초대받으면서 그들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강변에서 담배를 피우며 마주 볼 때 유스케는 2년 전 아내의 죽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공적인 관계에서 사적인 관계로 조금씩 변화한다.


코우지가 아내의 이야기를 유스케에게 해 주었을 때 미사키 역시 앞자리에서 듣고 있었다. 코우지가 내린 뒤 유스케는 조수석에 앉고 그들의 시선은 전면을 향하지만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 미사키는 코우지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물음에 답하는 수준의 수동적인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차는 둘이서 속마음을 터놓기 좋은 공간이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 이외에 아무도 없고 상대가 운전을 하는 경우 눈을 마주치지 않기에 마치 혼잣말을 하듯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다. 둘은 상대를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고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연기를 할 수 없는 유스케가 다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는 미사키의 고향에 가자고 한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하루 꼬박 운전해야 도착하는 곳까지 가면서 그들은 고백을 하나씩 한다. 유스케는 아내가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일찍 오라고 한 날 일찍 돌아가지 않고 차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늦게 도착해 쓰러진 아내를 죽게 만들었던 걸 고백다. 이에 조응하듯 미사키는 산사태가 일어나 집이 무너진 날, 빠져나온 뒤에 어머니를 바로 구하러 가지 못한 걸 고백한다.



공감은 단순히 상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 같은 것을 경험하고 같은 생각을 할 때 좀 더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진다. 유스케와 미사키가 이런 경우다.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한 아내와 학대를 지속해 온 어머니는 소중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미움의 대상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복잡해지고 쉬이 분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감정을 느끼는 미사키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얘기할 때, 유스케는 묵혔던 감정을 되새기고 아내에 대한 사랑, 증오, 그리움을 하나씩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묵혔던 감정을 풀어낸다.




 아내와의 관계에 있었던 구멍은 그녀의 죽음 후, 유스케 내면의 구멍이 되었고 그 구멍을 직시하지 못하는 유스케의 삶에 균열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을 사랑했던 코우지와의 대화를 통해 구멍을 직시하게 되고,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미사키와의 대화를 통해 구멍을 인정하고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한다. 세 시간의 러닝타임은 이 구멍을 성급하게 메우려 하지 않는 기다림이기에 클라이막스에서의 감동이 깊게 울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울림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내내 도로 위를 달렸던 사브(Saab)의 선연한 붉은색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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