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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Mar 24. 2024

Eyes on me

2024년 3월 24일

 서울에 오니 확실히 만나는 사람이 늘었다. 여자친구를 제외하고 일주일 평균 두 번 정도 약속이 잡히는데 내가 주도적으로 약속을 잡은 건 한 달에 한 두 번 꼴이다. 물론 약간의 혐의(?)가 있는 약속도 있는데 이를테면 단톡방에서 뭔가 만나자는 흐름이 생겨 거기에 물장구를 좀 치는 정도?


 대파 말고는 모든 것이 비싼 고물가 덕분에 약속 한 번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약속에 술이 함께하면 N빵으로 해도 5만 원은 훌쩍 넘는다. 매주 정리하는 가계부 수치를 보며 한숨 쉬다가 문득 궁금해서 단톡방에서 친구들에게 월간 친목비를 물어봤다. 30대 중반인 내 친구들의 친목비는 적으면 20만 원, 많으면 50만 원을 웃돈다. 나도 세어보면 밥과 술값만으로 계산했을 때 50만 원 정도였다.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하는 시기라 꽤 뼈 아픈 지출이다.


 사람 욕심이 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러나 30대 중반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모난 돌 같은 나같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려는 마음 때문인지 약속이 잡히면 당일 노쇼 같은 건 엔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텐션이 떨어져 아무도 만나고 싶은 날에도 약속을 가기 위해 유산소 운동을 해서 땀을 뺀 뒤 억지로 텐션을 올려서라도 간다.


 허나 돌이켜 보면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 약속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제일 큰 이유는 썩어가는 나의 뇌 때문일 테고 두 번째는 만나는 기간의 텀이 길어지기에 서너 시간을 만나도 쌓인 근황을 교환하다 보면 시간이 다 간다. 맥락이 깊게 깔린 모임이 아니면 누군가의 개인사에 깊게 파고드는 대화보다는 최근 했던 소개팅이나 연애사 같은, 상대적으로 얕은 수준의 TMI가 오간다. 물론 난 연애 얘기는 매우 좋아하지만 도돌이표 같은 대화는 질릴 수 밖에 없다.


요즘 연애 안 해? 왜?
그냥, 사람 만나기 귀찮아.
그래도 연애해야지, 나중에는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난다?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은데 그런 자리가 점점 없어진다야.
아 모르겠고, 원하는 취향 말해봐.
(그러면서 폰을 뒤적거리며 소개팅해 줄 사람을 찾는다. 늘 그렇듯이 적당한 사람은 없다)


요러한 느낌의 대화를 반복한다. 모든 대화의 목적성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날 것 투성이의 대화를 좋아하고 그런 대화 속에서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좋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를 억지로 이끄는 건 그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대한 배려가 아니라는 생각에 맞추는 대화를 반복하고 만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을 듣는 내 지인들은 서운할 수 있지만 그건 그들의 탓만이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의미 없다고 느끼는 데에 제일 큰 책임은 언제나 나에게 있다. 재미는 함께한 이들의 농담으로 얻을 수 있지만 그 시간의 의미를 만드는 건 오직 나뿐이다.

 

 요즘 부쩍 친해진 한 형과 게임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나온 파이널 판타지 7 리버스 얘기를 했다. 게임을 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시리즈 최고의 명작인 7이기에 파이널 판타지 얘기를 하면 7부터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벽 1시 가게 마감에 맞춰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가게 앞에서 담배 피우는 형 옆에서 문득 깨달았던 건 사실 나는 7은 플레이한 적 없고 오히려 그 다음에 나온 8을 정말 재미있게 했다는 것이었다. 7이 워낙 명작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리메이크 버전도 역시 호평을 받기에 플레이도 안 하고 나무위키와 유튜브로 주워 담은 지식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내 경험과 생각은 없고 그저 관성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얘기를 하면 최근에 나온 7 리메이크를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몰개성 한 사회화에 매몰된 내가 있었다.


그 충격이 머리를 지배할 때 즈음 얻어 타는 택시에서 술이 반쯤 취한 형에게 계속 말하고 있었다.


우와, 난 사실 7 해본 적도 없는데, 7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내가 플레이 했던 건 8이고 나는 그걸 정말 좋아했거든. 그렇지만 아무도 8 얘기는 하지 않잖아
8도 명작이지.
8 알아? 해 봤어? 다들 7이 명작이고 8이 범작이라고 하지 않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7 얘기부터 하는 거야. 7은 해본 적도 없으면서.


나 혼자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와중에 형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형도 8을 했다는 것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8도 단순한 범작은 아니고 그 당시 최대 히트작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난 택시를 내리면 eyes on me(파이널 판타지 8의 주제가)부터 들을 거야. 내가 그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새벽 1시를 넘긴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마시면서 나는 eyes on me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형은 그런 나를 보며 허허 웃고 있었고 남양주에서 하남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20년 전 좋아했던 그 뮤직비디오를 끊임없이 돌려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택시 기사 아저씨께 파이널 판타지 8 얘기를 할 뻔했다.


If frown is shown then I will know that you are no dreamer.


누군가와의 대화가 의미 없다고 느껴진 건 어쩌면 대화나 상대 탓이 아닌 내가 의미를 지워내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파이널 판타지 8은 7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나에게는 훨씬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게임이다. 알파벳을 겨우 알던 내가 한글화도 안 된 게임을 하느라 대본을 펼쳐가며 했었고 오랫동안 컴퓨터를 붙들었다. 다음에 파이널 판타지 얘기를 한다면 나는 꼭 8부터 얘기 할 거다. 7이 아무리 유명해도 거기에 내 얘기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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