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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Sep 16. 2016

가을은 산책의 계절

꿍꿍이 리턴즈

 오후 9시쯤, 밖의 일을 끝내고 지쳐서 터벅 걸음으로 돌아온 집에는 하루 종일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생물 하나가 요란스럽게 날 맞이한다.


  녀석은 앵앵 울거나, 스크래처를 박박 긁거나,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잽싸게 무릎에 올라와 나를 힐난하는 눈빛을 보낸다. '날 내버려두고 어딜 싸돌아 다니다 온 거야 이놈 시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정말이지 '개 같은' 녀석이다. 생긴 건 도도한 주제에.


예를 들면 이런 몸부림

 녀석을 무릎에 앉힌 채 채용 공고라도 확인하려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면 녀석은 자리를 옮겨 책상 위에 앉는다. 노트북 자판에 앉기라도 하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이리저리 밀어내도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책상 위 자기 지분을 챙기는 녀석이다. 그렇다고 나도 따라 책상 위에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귀여우면 다인 줄 아나, 짜식이.


책상 위의 팜므파탈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 현관문 쪽으로 조금만 가까이 가면 어느새 녀석은 신발장에 앉아 빵을 굽는다. 신발 모양으로 웅크린 녀석은 무언가 바라는 눈빛을 보낸다. 애써 무시하려던 나는 이제 모른 척할 수가 없게 되었다.



녀석은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한다.


 에휴 어쩔 수 없지, 한숨을 쉰다. 녀석은 이미 알아버렸다, 바깥세상의 즐거움을. 어쩌겠나, 창밖으로 바라보던 것 정도만 즐기던 녀석을 밖으로 이끈 게 나인 것을. 꿍꿍이는 그 흔치 않다는 산책냥이었다. 고양이 카페에선 흔히 냥바냥(케이스 바이 케이스 고양이 버전)이라는데 나는 당첨된 듯했다. 배변 처리용 도구와 가슴 줄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가슴 줄을 채우고, 손잡이 줄을 내 손목에 감고, 샌들을 신었다. 시간은 열 시 즈음, 현관문을 나섰다.


바깥 세상을 향하던 녀석의 시선

 호기심이 많지만 동시에 겁이 많은 녀석. 차를 특히 무서워해서 엔진 소리라도 들리면 난리를 친다. 그래서 산책 시간은 주로 늦은 밤. 모든 풀때기 맛을 다 보겠다는 각오인지 멈춰서서 하나씩 다 씹어본다. 줄을 잡고 기다리는 나는 신경도 안 쓰고. 붙잡고 있는 가슴 줄은 녀석을 이끌기 위한 게 아니라 뛰어서 날뛰는 걸 잡아주기 위한 용도다.


멋대로 잠복수사 중인 꿍꿍이. 대체 누굴 체포하려고. 줄을 잡고 있는 나도 덩달아 잠복 중.


 '어머 고양이가 산책을 다하네'라는 반응은 이미 익숙하다. 자주 가는 코스인 뒷산 공원에서는 캣맘 아주머니들과 안면도 텄다. 줄 하나로 이어진 우리 중 리드는 주로 녀석이 하지만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풀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라 치면 줄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준다. 그 이상은 안돼. 녀석은 타협을 할 줄 아는 고양이기에 이내 길을 되돌아온다. 가끔 가다 고집을 피우는데 그럴 땐 몸을 뒤집고 뒷발로 줄을 빼려 한다. 그럴 땐 내가 양보. 이어진 줄은 때로 우리의 의사전달 수단이다. 마치 어렸을 때 만들던 실로 이어진 종이컵 전화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합의의 과정을 거치며 나아가는 산책길에서 우리는 만났다, 이 공원의 여왕 하나코를. 공원 한가운데에 버려진 건지 놓인 건지 모를 소파에 앉은 검은색 무늬가 조금 섞인 새하얀 고양이. 고고함이 느껴진다. 길고양이면서도 때가 타지 않은 새하얀 털을 자랑하는 이 녀석은 누군가가 버린 고양이라고, 옆에 있던 캣맘 아주머니가 말해줬다. 하나코라는 이름은 그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 건데 모든 주민이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이름을 말해 준 아주머니 외에도 보러 오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했다. 살짝 잘린 왼쪽 귀는 중성화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다른 주민들과 잘 어울리곤 하는 그녀는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이 또한 유기묘의 특성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버려졌지만 스스로가 사람을 끊지 못한다. 버린 사람은 그걸 알까. 누군지는 몰라도 길가다 고양이 똥 백 번은 밟았으면 좋겠네. 물똥으로.


꿍꿍이와 하나코, 누가 집냥이고 길냥이인지.


 본가에 있을 때 다른 고양이한테 줄곧 해코지를 당해 기죽어 살던 꿍꿍이지만 나와 살면서 자신감이 생겼는지 먼저 다가갔다.


친해질 수 있는 기회는 다음에


 하지만 실패. 이 공원의 다른 고양이들도 쉽게 제압하는 하나코라는데 꿍꿍이가 다가가니 쏜살같이 도망간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놀랜다. 자신감이 붙어 달리는 꿍꿍이를 따라 덩달아 달리던 나는 잡고 있던 줄에 힘을 준다. 여기는 쟤가 사는 구역이야, 우리는 잠시 시간을 보내다 가는 거고. 존중해줘야지 그럼. 도망간 하나코는 우리가 공원에 있는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체조하는 할아버지, 공원 운동기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두 명의 여학생, 간식 캔을 들고 다니는 캣맘이 있는 밤 열 시의 공원은 시끄럽지는 않지만 포근함이 맴돌았다. 9월의 밤은 여름이 갔다고 말하기엔 애매하다. 그래도 가을의 시원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돌은 나와 꿍꿍이는 입구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리막 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내 발걸음을 따라 꿍꿍이가 박자를 맞춰 걷는다. 집으로 들어와 가슴줄을 풀으니 녀석은 이내 바닥에 털썩 다. 만족스러운 산책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누웠다. 물티슈로 발을 한 번씩 닦아줬다.  





 그렇게 녀석과 함께하는 가을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함께 한 산책은 기분 좋은 피로감을 주었다. 혼자 살 적엔 몰랐던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 때문인지 옛적에 포기했던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자식 같은. 책임질 대상을 지금에서 더 늘려도 될 것 같은 희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거기에는 힘겨운 책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희망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부족한, 스물여덟의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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