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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Feb 06. 2017

짧은 공감보다 긴 질문이 좋다.

상대가 공감해준다고 내가 공감받는 건 아니다.

 '공감해준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응, 그렇구나' '맞아 그렇지' 같은 말만 하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공감이 싫었다. '해준다'라는 어미에 담긴 적선의 의미가 싫었다. 공감받는 건 기쁜 일이지만 해 달라고 한 적은 없다. 공감의 대화 같은 책에 나와 있는 '상대방의 말을 따라 해라' 같이 스킬을 익히기만 하면 언제든 가능한 게 아니라고, 괜한 반골 기질로 저항하고 싶었다.


공감은 쉬운게 아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서 선입견이 해제되는 감각을 좋아한다. 외견, 말투, 짧은 대화를 통해 생성된 선입견은 불가피하지만 그래도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해제된다. 가끔씩 더 강화되기도 하지만.


 S와 친해지는 과정도 그랬다. S는 같은 과 동기지만 친해진 건 졸업을 앞둔 때였다. 화려하게 생긴 S는 새내기 시절 100명이 넘는 과모임에서 봤을 때도 '잘생겼다'라는 인상이 확연히 남을 정도로 잘 생겼다. 흰 얼굴에 길쭉한 팔다리, 오떡한 콧날에 동그란 눈. 덜 마모된 송곳니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종강파티에서 같이 같은 테이블에 앉은 학우가 '어떻게 그 얼굴로 여자친구가 없을 수 있냐'라는 말을 했다. 드라마 대사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서 들으니 제법 신선했다. 나는 물론 TV 앞에 앉은 평범한 시청자였다.


'



 S와 친해질 무렵 나는 한 후배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키가 크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이름도 모르는 외국 음악을 많이 듣는 애였다. '지적 허영'이라는 말을 처럼 했다. 'Belle and Sebastian'을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본 건 겨울밤, 좁은 이자까야 바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 할 때였는데 그때 입은 진한 붉은색 코트가 인상적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나는 난생 처음 까였는데 반년 뒤에 또 들이댔다가 또 까였다. 까이는 과정은 비슷했다.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당일이 되어서는 연락두절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 당한 뒤 잊고 있다가 나의 친구이자 그녀의 친구이기도 한 H가 그녀의 생일날 연락 해보라 해서 그걸 계기로 연락을 재개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밥 약속을 잡았다. 6시에 학교 정문에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다른 학교도 비슷하겠지만 우리 학교에서 정문은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해서 학교 근처에서 만날 약속이 있으면 정문에서 본다. 그날도 많은 친구, 연인, 선후배들이 약속을 잡았고 기다리던 사람을 보면 웃음을 머금고 그 자리를 떠났다. 30분이 지났을까, 정문에는 나를 포함해 두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했지만 받질 않았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되기 싫었다. 그 후 정문에서 약속을 잡으면 기다리기 싫어서 정시에 맞춰서 갔다.


 다음 날, H에게 혹시 연락두절이 되진 않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혼자서 자취하는 애였으니 만에 하나의 불상사를 생각해서였다. 다행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H와는 연락이 잘 되었다. 연락이 안 되는 건 나뿐이었다. 그 학기를 마치고 그녀는 졸업했고 그 이후 연락한 적은 없다. 물론, 연락이 온 적도 없고.


 그래도 궁금증은 남았다. 톡 하다가 답장 끊고 그러면 어련히 물러났을 텐데 그녀는 왜 굳이 약속을 잡고, 바람을 맞힐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두 번이나.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아리라, 라는 단순한 생각에 친한 여자애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걔는 왜 그랬을까?


 "와 진짜 너무하네. 어떻게 그러지? 왜 그런 애를 좋아해요 오빠는?"
 "저라면 절대 안 그래요. 최소한의 매너가 있지."
 "약속을 잡고 연락두절이 되다니, 그건 아닌 듯. 그것도 같은 과 선후배인데."


 난 분명히 '왜 그랬을까'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전부 '참 나쁜 년이다'였다. 상처받은 내 마음을 위해 해준 말이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거절을 두 번 당한 이상 감정은 이미 떨어져 버려서 미워하거나 그런 건 안 남았었다. 그냥 궁금했다. 호오(好惡)보다 호기심이 더 오래간다, 내 경우엔. 왜 그랬는지 물어봤지만 "그런 게 왜 궁금하냐?"와 "이상한 사람이에요, 빨리 잊어요"같은 말만 했다.


 2개월 후, 파스타 집에서 S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서로 연애 얘기를 하다가 한동안 까먹고 있는 그 주제를 경험이 풍부한 S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S 역시 그건 좀 아니다, 라는 반응이었지만 '왜 그랬을까'라는 나의 말을 듣더니 곰곰이 생각한 후 '그녀의 맘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라고 했다. 이제까지 들었던 대답과는 달랐다.


 "그 있잖아, 외롭지만 딱히 누군가를 사귀자니 귀찮을 때. 그럴 때는 누구든 다가오면 거부하지는 않거든. 연락 오면 오는 대로 주고받고 하는 거지. 그러다 상대가 갑자기 만나자고 하거나, 데이트 신청을 하면 부담스러워지는 거야.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며칠이 지났고 답장을 하려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고. 결국 답장도 안 하고 오는 연락도 다 무시하다가 그쪽이 질리면 그대로 끝,인 거야. 나도 몇 번 있었어."


몇 번이나 있었구나.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내 앞에 있었다.


 그 뒤에 "물론 약속 시간까지 잡고 연락두절이 되는 건 상도덕이 없네"라고 덧붙인 S였다.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게 아니라서 세세한 건 알 수 없겠지만 그 감정의 맥락이 이해가 된다고 할까. '그녀한테 나는 그 정도로 무성의한 대상이었구나'라는 씁쓸함은 별수 없었다. 그러나 비로소 모든 감정이 정리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경제학자보다 도덕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공감을 '다른 사람이 처한 입장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여자애들이 한 건 공감이 아니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 원했던 건 '그녀가 밉다'가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느끼는 답답함'에 대한 공감이었다. S는 어찌 보면 이기적이었던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지만 덕분에 나는 공감받았다. 아니 공감받았다고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감하기 위해선 쉽사리 마침표를 찍기보다는 물음표를 나열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구나.', '나도 그래.'라는 말을 반복하며 상대방과 비슷한 표정을 짓는 것보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한다. '걔랑은 어떻게 친해졌는데?', '저녁 메뉴는 뭘 먹기로 했고?' '평소 얼마나 연락하고?'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머릿속에서 그린다. 그리는 이미지 속에서 나의 경험을 발견할 때, 비로소 상대의 경험에 나를 대입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좋다' '싫다'라는 것 정도로 단순화하는 게 아닌 질문을 통해 맥락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기 쉬워진다.


 졸업 직후, 서로 바쁜 시기다 보니 S와는 종종 연락하지만 얼굴을 본 지는 1년이 다 되어 갔다. 새해가 밝아 오는 날, 그와 술 한 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상학을 부전공으로 한 S는 옷을 입을 때 티셔츠, 바지, 팔찌, 신발, 어디든 꼭 꽃무늬가 있어야 된다는 원칙이 있다. 술 한 잔 하며 회포를 풀게 될 날, 녀석은 어디에 꽃을 달고 올까?


 날 두 번 바람 맞힌 그녀는 다리 건너 들은 소식으로 졸업 후 영국으로 워홀을 갔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그녀 덕분에 그냥 친구가 '괜찮은 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렇게 되돌아보니, 그 경험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Belle and Sebastian 이라는 좋은 가수도 알게 되었고. 'Little Lou, Ugly Jack, Prophet John'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그 감성이 그리워 듣는 노래다.


 물론 두 번 까이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여름마다 영국에 가는 친구에게 혹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키가 173.5에다가 눈물점이 있는 한국인을 발견하면 아무 이유 없이 한국어로 욕 좀 해달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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