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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an 03. 2017

표절의 추억

되짚어 봐야 할 부끄러움

 아마 5년도 더 전이었을까. 브런치 이전에 블로그를 잠시 한 적 있었다, 두 달 남짓.


 부끄럽지만 자소서에는 쓸 수 없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을 종종 해왔다. 그런 잘못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스피츠(Spitz)라는 가수를 좋아했었다. 80년대 후반에 데뷔하고 지금도 활동하는 밴드다. 일본인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다들 이름은 알 정도로 현지에선 꽤 유명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활' 정도 일까. 일본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도 이들 때문인데 한 100곡 정도 가사를 직접 필사하고 나니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다.


 한창 그 밴드에 빠졌던 때, 가사를 전부 번역해 놓은 블로그를 발견했다. Spitzhaus라는 이름의 블로그다. 티스토리라는 블로그 포맷을 활용했었다. 우리나라에 발매되지 않은 스피츠의 노래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학교를 마치고 컴퓨터를 하면, 별생각 없이 들어가 음악을 들었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그로부터 일 년 뒤였다. 블로그를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꾸준히 들르는 블로그가 Spitzhaus가 유일했던 만큼 티스토리에 마음이 갔다. 활동하는 블로거의 추천장이 필요한 시스템 때문에 Spitzhaus 주인장에게 요청했다. 흔쾌히 추천해준 덕분에 블로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기 형식의 글을 쓸까 하다가 아무도 안 들어올 것 같아서 좋아하는 외국 노래의 가사를 쓰고 번역했다. 블로그는커녕, 미니홈피 하나도 운영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생각나는 포맷은 Spitzhaus 뿐이었다. 앨범 이미지를 제일 상단에 띄우고, 앨범명, 발매일자, 노래명을 입력했다.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하다 보니 비슷한 정도였다. 하단에는 번역하면서 필요한 주석들을 달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Spitzhaus에 들어가서 본 뒤 알트 탭을 누르며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포스트 하나를 전부 작성하고 난 뒤 눈앞에 보이는 건 배경색만 다르고 포맷을 그대로 베낀 결과물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포스트를 올리고 나서도 별다른 죄책감은 없었다. 상업적으로 활용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블로그 포맷인데,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포스트를 3개째 올릴 무렵, 댓글을 단 사람이 있다는 알람이 떴다. 처음이었다.


 익숙한 닉네임이었다. Spitzhaus의 주인. 댓글의 내용은 평이했다. 내가 올린 노래를 자기도 좋아한다는 내용. 수치심은 그 순간에 몰려왔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덜미엔 땀이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운영자는 내 블로그 글을 보고 자기 것을 따라 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마치 그 말속에는 보이지 않는 경멸이 담긴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한 순간 부끄러움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모든 글을 숨김 처리한 뒤 5년 넘게 블로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블로그를 지우는 방법을 몰라 지우지도 못한 채 지금도 이름만 남은 채다.


 '표절의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점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윤종신의 말이다. '표절의 여부를 제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건 본인뿐이다.' 무언가를 만들 때 머릿속에서 분명히 '따라 하고 있다'라는 의식이 있어야 된다는 관점이다. 나의 경우, 이 관점으로 볼 때 해당 블로그를 직접 들어가서 대조하고 베낀 그 시점에서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표절이다. 확신범이다. 온 우주가 나서서 별거 아니라고 해도 밀려오는 자괴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Spitz, Hachimitsu(ハチミツ), 1995년 발매 앨범표지. 부끄러운 사람은 해맑은 웃음도 비웃음으로 느껴진다.




 5년도 넘은 지금, 뻔뻔해진 건지 당시에 느꼈던 부끄러움은 많이 옅어졌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부끄러움을 술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잊지 않기 위해.

 부끄러움을 잊고 뻔뻔해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나는 그럴 자격이 있나라는 의심을 놓지 않기 위해.


 그런 이유에서 지난 부끄러움을 돌이키고, 곱씹는다. 곱씹는 부끄러움 속에는 쓰디쓴 커피 속의 미세하게 느껴지는 단 맛처럼, 아직 부끄러울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다.


 해가 바뀌고 스물아홉 살, 나는 아직 부끄러워할 수 있다. 그 사실에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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