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채식주의자> 감상평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대할 때 머리 속에서 대상을 분류하는 것을 즐겨한다. 주어진 대상이 그대로 머리 속에 들어오면 인상이 흐릿해져 금방 잊혀지기에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게 사물(혹은 가끔씩 사람까지)을 대하는 방법이다. <채식주의자>는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구성 쪽에 눈을 돌렸을 때 제법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정리해보았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채식주의자이기를 선언한 영혜를 둘러싼 남편, 형부, 그리고 그녀의 언니의 세 시점에서 구성된 이 연작소설은 그 관점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 이야기 '채식주의자'에서 남편은 아내인 영혜에게서 평범함 이상의 특질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내의 이상 행동을 확인후 당황과 분노, 난처함, 포기, 방관으로 태도를 변화시키다가 이윽고 다음 장에서는 이혼함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제해버린다. '몽고반점'에서 예술가인 형부는 처제로부터 어떠한 예술적 영감을 얻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하려 한다. 마지막 이야기인 '나무 불꽃'에서 그녀의 언니 인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바라보며 평범하게 살아가려 한 자신과 그럴 수 없는 동생의 삶을 돌아보고 결말 부분에서 일말의 이해 가능성을 보여준다.
배제
무언가를 대할 때, 특히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대할 때 배제는 편리한 방식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못 본체 한다, 혹은 눈 앞에서 치워버린다. 감정 소모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명 모든 대상에 공감과 이해를 시도하려고 할 때 오는 피로감은 괴로울 수 있다. 생각의 틀을 한정하는 건 스트레스 해소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남편의 방식 역시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단 느닷없이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영혜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삶에 있어서 불가해한 일은 언제고 나타날 수 있다. 그 대상을 배제하는 게 불가능할 때도 적지 않다. 자식들 전부 결혼시키고 남은 여생을 큰 변화없이 보내리라 예상한 부부가 갑자기 이혼한다. 바람도 아니고 가정폭력도 없는 그 부부가 왜 이혼하는지는 자식도 모른다. 이런 경우가 닥칠 때마다 모르는 척, 못 본 척 삶에서 배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결국 스스로가 설정한 좁은 상식의 선에서만 상대를 대하려고 하면 언제까지고 이해는 다다를 수 없다. 때로는 상식의 틀을 넓히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30년 가까이 잘 살던(적어도 그렇게 보이던) 부모가 황혼 이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질문을 하고 고민도 해 봐야 한다.
평범함에 집착하는 남편의 특성은 다른 두 명과 대조를 지닐 수 있지만 다소 극단적이다. 평범에 대한 그의 집착은 어찌 보면 영혜의 돌출 행동만큼 이해가 어렵다. 좀 더 글 속에 그의 삶의 맥락이나 혹은 범상한 인물로 구성했으면 어떨까 싶다. 가까운 누군가를 삶에서 배제하는 건 행동 자체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선택이기에, 고민의 흔적을 더함으로써 인물을 좀 더 입체적으로 구성했으면 어떨까 한다. 그러한 흔적 없이 한 그가 한 배제는 개연성이 적어보인다.
공감
공감은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주장의 근거로 곧잘 활용된다. 유교의 측은지심부터 심리학 용어인 '거울효과(Mirroring Effect)'까지, 타인의 아픔이나 기쁨을 마치 자신의 것과 같이 느끼면서 인간의 이기심은 타인으로 확장하여 이타심으로 나아간다.
'몽고반점'에서는 공감을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꿈을 꾸었다'라는 막연한 말 한마디로 자신과 주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선택을 한 영혜에 대한 공감은 남편은 물론 다른 가족들도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서 부상한 게 예술가인 형부. 그는 처제의 몽고반점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은 듯했다. 자신의 벗겨지는 머리와 나오기 시작한 배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을 고려해보면 일종의 유아 성애 요소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런 결론을 이끌기엔 책의 내용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형부가 영혜와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리고 뒤섞이는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성교를 한 후 그들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에서 공감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났다. 엇갈리는 듯한 대화지만 그 순간 작품 내에서 유일하게 영혜는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공감, 혹은 교감의 다른 면은 배타성이다. 아주 좁은 범위에서 생성된 공감은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세계에 몰입하려 한다. 사고와 감정이 육체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성교를 통해서 공감은 더욱 확장•심화될 수도 있다. 절정에 이르며 육체적으로 일체에 이른 순간 그들은 분명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혜는 그가 언니의 남편이라는 것이, 형부는 상대가 아내의 동생이라는 것이 아무 상관도 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매이자 아내인 인혜가 보기엔 그저 괴이한 상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 보여지는 맥락이 없는 둘만의 공감은 다른 사람들에겐 불가해의 대상이다. 그들의 공감에 그녀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기에 성교 현장을 목격한 인혜가 정신병원에 전화한 건 당연한 순리일 수 있다.
이해
인혜는 영혜를 이해했을까?라는 의문점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떠나지 않은 의문이었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해(理解)는 '사물의 본질을 해석하는 것', 또는 '남의 사정이나 형편을 너그럽게 받아들임'이다. 유사어로는 납득이나 양해가 있다. 첫 번째가 주로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이해라면 두 번째는 같은 인간에 대해서 주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째 의미를 좀 더 풀어서 해석하면 어떠한 사람이나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있는 일로 납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싶다. 다만 납득과 양해와는 구별되는 이해라는 말 본연의 의미가 있을 게다.
단어에 대해 한 두 줄로 설명하는 사전은 경제적이지만 불충분하다.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문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은 때로 특정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으로써 바라볼 수도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나무 불꽃'은 '이해'라는 말을 위한 긴 예문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해의 가능성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축적된 시간과 비슷한 상황의 공유다. 인혜는 영혜와 같은 집에서 자란 자매이기에 자연스럽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영혜가 벗어나려 하는 육식 자체의 폭력성을 아버지의 학대라는 경험으로 공유했다. 많은 시간 동안 그녀를 보았고 그녀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의 가정이 생기고 삶이 분리되면서 관심도 멀어져 갔다. 그러나 영혜가 채식주의를 선언하면서 아버지가 다시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영혜가 남편과 이혼해 생활을 보살펴줘야 했을 때, 형부인 자신의 남편과의 행위를 눈앞에서 목도했을 때 그녀는 다시금 영혜와 많은 시간을 공유할 계기가 생겼다. 거기에 남편과의 결별 및 아들의 폐렴으로 삶이 불안정해지면서 그녀의 영혜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주위가 전혀 다르게 보인 것이다. 즉, 가족으로써 함께한 시간과 연달아 주어진 불안정한 사건들이 인혜의 영혜에 대한 시각을 변화하게끔 하였고 그녀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
'누군가를 이해했다'라는 결과적인 의미로서의 이해(理解)가 아닌 누군가의 삶에 다가가려 하는 과정을 이해라고 볼 때 '나무 불꽃'은 인혜의 영혜에 대한 이해의 과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구누구는 이렇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 깊은 이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의 필수조건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영영 잃어버린다. 따라서 영혜를 바라보는 인혜의 시선과 생각의 변화를 그리는 '나무 불꽃'은, 이해라는 말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예문으로써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배제, 공감, 이해 사람을 대하는 이 세 가지 방식은 서로 대조적이지 않다. 관계 형성에 따라 같은 사람에게 이 세 가지 태도를 동시에 취하기도 한다. 입이 가벼운 동기 A는 나와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지기에 공감이 가능하고 입학과 입대, 취업을 비슷한 시기에 해서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른 친구 B가 남에게 꺼내기 어려운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는 자리에는 결코 A를 부르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으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깊게 돌이킬 기회를 주는 이야기'라고 답한다. 그렇기에 후자에 속한 <채식주의자>는 좋은 이야기이며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P.S
작년에 <채식주의자>를 읽고 난 뒤 쓴 감상평입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 이었으나 올해 맨부커상 수상으로 많은 분이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