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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19. 2017

차갑지만 따뜻한

<언노운 걸>, 장 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차가운 인간미, 형용모순 같지만 좋은 영화는 그런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이야기했다. 이는 전작 <내일을 위한 시간>과 마찬가지다.



 개인병원에서 임시 의사로 근무하는 제니 다뱅(아델 하에델)은 어느 날, 진료시간 이후 방문한 환자를 무시한다. 다음 날 찾아온 형사는 그 소녀가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형사는 소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사건 당일 거쳐간 장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시한 환자는 그 소녀였다. 소식을 듣고 그녀는 최소한 소녀의 이름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열어주지 마, 진료시간 지났어


그녀는 왜 소녀의 이름을 알아야 했을까?

 전날 같이 일하는 인턴에게 충고하던 냉정한 모습과 달리 다음 날 이름도 모르는 소녀의 비보를 듣자 제니는 패닉에 빠졌다. 병원 입구 CCTV로 보이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봤을 때는 그 충격이 더 컸다. 우연히 그녀의 진료 환자 중에 목격자가 있다는 걸 안 제니는 더 좋은 병원으로의 이직을 취소하면서까지 소녀의 행적을 추적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연관성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본다. 피부 껍질 하나로 범인을 추적하는 현대 수사물 방식과는 거리가 먼 원시적인 방식이다. 애초에 그녀가 하는 건 수사가 아니었다.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나름의 속죄였다.


그 쪽 나라에서는 제법 3D 직종, 의사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진 않지만 영화를 통해 현실을 유추할 순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프랑스에서 의사는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인기 직종이 아닐 것이다. 방문환자를 상대하는 것뿐 아니라 주치의로서의 활동도 하는 그녀는 낡은 진료 가방을 들고 밤낮 가리지 않고 왕진한다. 밤늦게 허리가 나간 긴급 환자의 전화를 받고는 자다 일어나 머리가 떡진 채로 진료를 하러 가고, 남자 혼자 있는 집을 찾아가 진료할 때는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노고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녀는 주치의직으로부터 해고당하기도 한다. <언노운 걸>에서 제니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연애질이나 거창한 수술 따윈 하지 않는다. 개인병원의 의사인 그녀는 환자의 증상을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진단서를 끊고 대형병원 진료를 권유한다. 그녀가 의사로서 발휘할 수 있는 퍼포먼스는 제한이 많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의사로서의 의무감은 확고하다. 비밀유지 의무를 위해 환자에게 들은 중요한 증언을 결코 발설하지 않는다. 직업적 소명의식과 더불어 이웃을 향한 인간애 역시 갖췄다. 소명의식과 인간애, 비슷한 범주로 보이는 두 가지는 그녀가 소녀의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에서는 제법 충돌한다. 그녀가 진실을 파헤칠수록 사건과 연관된 환자들은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청진기를 대고 귀를 기울이듯 진행하는 그녀의 수사는 상대의 눈과 입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미세한 힌트마저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녀 때문에 부담스러운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환자들은 병을 치료해줘야 할 의사로부터 심적 부담을 얻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치료를 진행하며 동시에 부담스러운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점이다.


인간적인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꽤나 재미있는 포인트가 하나 있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많은 노력을 쏟는 그녀는 꽤나 인간적임에 불구하고, 표정 변화가 극도로 적다는 점이다. 인간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때 우리는 보통 다양한 표정을 비롯한 감정표현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녀는 희로애락의 상황에서 매우 절제된 감정만을 보인다. 그녀의 인간애는 행적을 통해서만 오롯이 드러난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개인 시간을 포기하면서 진료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의사자격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간 인턴을 위해 몇 시간이나 걸리는 곳까지 가서 설득한다. 심지어 범인이 자백했을 때 조차도 화내거나 두려워하기보단 담담히 자수하라고 설득한다. 캐릭터의 감정 묘사에 곧잘 활용되는 배경음악도 이 영화에서는 없다. 관객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그녀의 말과 행위에서 인간미를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방과 같은 표정을 짓고 '그렇구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친목모임 같은 곳에서 표현과 공감의 범벅 뒤에 찾아오는 건 공허함이다. 그 뒤에 지속성 있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의 의미가 '또 보자'가 아닌 '안녕, 잘 가'인 경우가 많듯. 모든 이와 진정성을 갖고 관계를 맺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과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제니는 이를테면 선물 받은 책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읽고 갑자기 연락해 묵묵히 긴 감상을 말해주는 사람과 같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선물해 준 사람에 대한 성의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언뜻 사람들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녀는 묵묵히 자신이 주위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고민한다. 이후의 행동은 말보다 빠르다. 업무시간 이후의 환자는 거부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개인주의자는 이야기 말미 밤늦게 그녀를 찾아온 범인의 자책과 변명을 묵묵히 들어주는 이웃이 되었다.





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 영화

 영화를 추천할 때 "꼭 봐"라는 말보다 "재밌을 것 같으면 봐"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분명 '봐야 하는' 영화다. 특히나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는 사람은. 조정래와 황석영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친숙한 '사사로운 개인'들에게도 공동체 의식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공동체 의식은 곧잘 집단주의 문화로 변질되어 개인의 희생을 의무로 간주한다. 그런 이 나라에서 개인은 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게든 공동체에서 끌어당기는 인력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었다.

 

 <언노운 걸>은 개인이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가기 위한 토대가 공동체임을 상기시킨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도 자신을 지킬 수 없기에 공동체적 의무를 개인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한다. 진료시간 외에 방문한 환자를 거부한 제니의 행동은 이기적이라 비난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로 인해 벌여진 비극으로부터 죄책감을 느꼈다. 제니가 소녀의 행방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를 귀찮아하고, 무시하고, 때로는 위협까지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불행을 눈 감을 때 오는 건 개인의 내적 붕괴임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인은 공동체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영화는 표정이 없는 제니가 묵묵히 소녀와 관련된 진실에 접근하는 행위에 집중하며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우리 둘 다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녀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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