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최악의 패전
한국사 3대 패전이라고 불리는 전투가 있다. 원균이 임진왜란 당시 칠전량에서 당한 칠전량 패전이이 있고,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3군단이 중공군과 북한군 3개 군단에 포위 당해 전멸한 현리 전투, 그리고 병자 호란당시 조선군 4만명이 청군에게 괴멸당한 쌍령 전투가 그것이다. 이들 전투중에 가장 유명한 전투는 아마 칠전량 전투일 것이고, 쌍령전투나 현리 전투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두 전투는 해당 전쟁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전투로 계속적으로 연구되고 평가 받을 가치가 있다. 쌍령 전투는 병자 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있고, 현리 전투는 지금도 계속 논쟁의 중심이되고 있는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을 미국이 가지게 된 계기가 된 전투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다음달에 영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남한산성]이 개봉 된다고 하니 쌍령 전투에 대해서 알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묘호란이 이후 형재의 관계를 약속한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을 계속 취하고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측이 후금과 명나라의 대립 관계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해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후금을 배쳑하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묘호란 이후 형재의 관계를 맺었던 조선에 대해 후금이 군신 관계로 변경할것을 요구함과 함께 후금의 왕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조선에도 국서에 후금의 왕에게 황제의 칭호를 쓸 것을 요구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가 계속 나뻐졌다. 이에 따라 인조는 전국에 척화의 선전 교서 (오랑캐를 물리칠 전쟁을 준비하라는 교서)가 내려지면서 양국간의 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결국1636년 음력 12월 2일 국호를 청으로 바꾼 청나라의 태종이 친히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된다.청나라의 전략은 조선군의 방어선을 무시하고 기병을 활용하여 신속하게 한양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세웠고, 이에 따라 평안도를 방어하던 임경업과 평안 감사 홍명구의 방어선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리면서 12월 12일에 한양에 도달한다.
(남한산성에서 항쟁 중인 조선군을 그린 기록화.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정부 요인들은 남한 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와 맞이하여 약 47일간 싸웠지만, 식량과 물자가 모두 바닦나고, 왕자들이 피신했던 강화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게 된다.)
청나라에 전광석화 같은 기병 전격전에 놀란 인조와 한양의 관리들은 강화도로 퇴각하여 방어에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 조정은 초기 전황의 불리함을 타계할 대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청군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방어선을 그냥 지나치면서 진격함에 따라 전란의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는 상황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병력이 소집되어 남한산성으로 구원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구원군중 경상도 근왕군은 경상 감사 심연의 지휘아래 우병사 민영과 좌병사 허완이 이끈느 약 3~4만명 정도의 대군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패로 생각됐다. 이들의 부대는 1월 2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쌍령에 선봉대 8000여명이 도착하여 청군의 진로를 방어 할 수 있도록 목책을 세우고, 방어 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조선의 대군이 쌍령부근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들은 청군은 패륵이 쌍령부분으로 진출하여 이들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쌍령 전투의 참가한 청나라 군의 전체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료가 없어 논쟁이 되고 있으나 장수 패륵이 약 60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이 쌍령으로 진격해왔다고 볼 수 있다.
양군이 처음 조우하게 된 것은 1월 3일로 당시 쌍령의 좌우를 좌병사 허완과 우 병사 민영이 각각 나누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청나라의 척후병 30여명이 조선군의 좌군 진영쪽으로 진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조선군은 대부분 화승총으로 무장한 총수병이였지만 훈련이 충분하지 않은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허완과 민영의 부대는 군사들이 총탄과 화약을 무 절제하게 사용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적은 수량만 지급하였다. 초기에 접근해온 척후병들은 조선군이 집중 사격을 퍼붓자 피해를 입고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번 불이 붙어 버린 조선군은 퇴각하는 적을 향해서도 총을 쏘아대면서 총탄을 순식간에 다 써버린 것이었다. 총탄과 화약이 다 떨어진 병사들은 화약을 더 달라며 소리를 치고 진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졌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청군의 기병대 300여기가 재빨리 목책을 건너 조선군 진중으로 쳐들어 왔고, 조선군 좌군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화약이 떨어진 총과 칼 활등 무기를 모두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진 뒤에 설치해둔 목책을 통과하는 것에 시간이 걸리자 뒤에서 밀려오는 병사들과 목책에 막힌 병사들이 포개지면서 목책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압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난리통에 병사들과 같이 퇴각을 하려던 좌병사 허완도 말에서 떨어져 도망치는 병사들에 밟혀 죽었으며, 밟혀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목책 높이를 넘어설 정도가 되고 목책 바깥쪽에 경사진 지형을 매울 정도가 되어서야 맨 뒤쪽에 있는 병사들이 그 시체들을 밝고 겨우 도망쳤다.
우군의 진영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편이여서 민영은이 병사들이 난사를 하는 것을 막으면서 그나마 잘 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군도 역시 지나치게 탄환과 화약을 적게 나누어줘 병사들의 탄환이 일찍 소진되었다. 이 와중에 진영 중앙에서 병사들에게 탄환과 화약을 나누어주던 군관과 병사들이 실수로 불씨를 화약통에 떨어트리면서 대 폭발이 발생, 수십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로 진영의 통제가 불가능한 혼란이 오게 된다. 이와 같은 혼란 상황을 본 청군의 기병 400여명이 목책을 넘어 조선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혼란 상황에서 좌병사 민영이 전사하자 병사들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면서 청군에서 무참하게 도륙 당하거나 도망치다가 서로 밟아 죽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한편 선봉 부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경상 감사 심연은 진을 치고 있던 여주에서 퇴각하여 조령으로 물러남으로써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고립되게 되어 1월 28일 인조는 항복을 한다.
(남한 산성의 모습. 인조는 이곳에서 청나라 군대에 저항하지만 팔도에서 모여든 지원군이 모두 패배하고, 결정적으로 경상도 근왕군 4만명이 청나라 군대에 패하여 물러남으로써 고립 무원의 외로운 전투를 하게 된다. 47일간의 저항이후 인조는 남한 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공신들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이자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편집증적인 반응도 서슴치 않았던 왕으로 기록된다. 인조의 통치아래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인조가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한 사건으로 (인조가 지시했다고 믿어 지고 있다.)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며 아들도과 손자까지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한 인조 시대에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김자점과 같은 인물을 비롯한 공신 세력의 비리로 인해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국론이 분열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것이 "추노"이다. )
쌍령 전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병력의 규모에 대한 사료가 남아있지는 않다. 추정되는 양측의 병력 규모는 조선군이 약 3만 ~ 4만명, 청군은 약 6천명 정도로 파악되지만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청군의 숫자는 약 1~2천명, 조선군은 1만에서 2만명 내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혹자에 많이 얘기되는 것 처럼 4만 군사가 300명에게 패한 전투는 아닌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 정부는 전쟁의 발발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고 전쟁을 맞이했고, 그로 인해 민생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오자 병법의 저자 오기가 말하기를 “군주로써 적의 침략을 받고도 나아가 싸우지 않는 것은 의롭다 할 수 없고,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죽은 병사의 시신을 보고 슬퍼하는 것은 어질다고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전쟁이라 함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하여 벌이는 최후의 수간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고, 만일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도록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임무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선 조선군은 임진왜란의 처절한 패배에도 공부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속국으로 살게 되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기업의 경우도 기업주가 전쟁터와 같은 시장에서 다른 경쟁자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만일 경쟁사와의 경쟁이 과열 되었을 때 낙오되거나 도퇴되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는 것 역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의 임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자는 “무릇 영명한 군주는 반드시 나라의 화합을 이루고 나서 국가 대사를 도모하였다…..백성들은 군주가 자신들의 생명을 소중희 여기며, 희생을 아까워한다고 믿게 되어야 군주가 전쟁에 임하면 병사들은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물러나 살아 남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피 지배계급간에 상호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결국 존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얘기 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겪고 있던 사회 신분 질서 체계의 붕괴와 혼란 속에서 전쟁을 준비한 것 자체가 무리였음을 설명해 준다. 당시 조선은 임진 왜란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을 못한 상황이었을 뿐 아니라 인조 반정 이후 이괄의 난 등을 겪으면서 사회 지배 계급간의 급격한 변화로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임진왜란 때 받은 피해로 인해 일반 국민들은 경제란에 시달리고 있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도 상당한 수준이였지만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군사 지배권을 강화하고 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무리하게 반청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이러한 사회 지배 계층의 행동들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괄의 난 당시 일반 국민들이 “누가 왕이 되던 무슨 상관이냐.”라고 자조했다는 기록으로 지배 계층과 피 지배 계층간에 반목이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 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인 훈련이나 군비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고, 전투가 벌어지면 병사들이 앞다투어 도망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기업의 경우도 내부의 결속과 인화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 결속과 인화는 단순한 인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경영의 투명성과 기업의 윤리적 도덕적인 가치관이 수립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윤리적 도덕적인 가치가 정립되지 않는 기업이나 단체 내에서의 인화나 결속은 오히려 불합리와 비리를 양산하고 조직을 더욱 위험에 빠트리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