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을 견디고 살아 남느냐, 명예롭게 이름을 남기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다
“조선의 운명이 걸린 47일간의 기록”,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7일간의 기록”
오프닝부터 좋은 흥행 성적를 내고 있는 영화 “남한 산성”의 광고 카피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치열함 보다는 시시각각 조여 들어 오는 거대한 위험에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살아서 치욕을 감수하고 후일을 도모 할 것인가? 아니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나 많은 영화들에서 다루어진 주제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이 다루고 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기존의 영화들과 다르다. 고립 무원의 승리의 희망이 없는 상황을 그린 대부분의 영화들이 영웅적인 죽음을 택한 주인공들을 그렸다면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은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1636년 인조 14년 겨울. 후금에서 청으로 이름을 개명한 여진족이 압록강을 넘어 공격해오자,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일부 병사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10만에 달하는 적에 비하여 성을 지키는 병사는 1만여명. 여기에 식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차디찬 한파는 방어를 고립 무원의 남한산성에 희망마저 사라지게 한다. 전국에서 몰려올 근왕병의 반격만을 기다리며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인조와 신하들은 이조판서 최명길을 중심으로한 주화파와 예조판서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로 대립하고 명예로운 죽음과 치욕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런 가운데 성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성안의 주민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간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때면 영화의 결말을 관객들이 알고 있기에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가 매우 어렵다. 작가 김훈의 동명 소설 “남한산성”은 이와 같은 약점을 당시 조정을 지배했던 두 사상 -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을 중심으로 고립된 성안의 군상들의 이야기로 극적인 흥미와 재미를 해결 했다. 영화 “남한산성” 역시 이러한 원작 소설의 기본적인 틀을 무너트리지 않는다. 이병헌과 김윤석이 연기하는 최명길과 김상헌은 영화 내내 굴욕적인 평화와 명예로운 죽음을 내세우며 인조를 연기한 박해일 앞에서 대립하고, 영화는 그들의 주장 중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들어 주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로 인해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 마다 다양한 해석과 접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고,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자문을 오랫동안 던질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 일부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 하기도 했다.(이런 왜곡 부분에 대해서는 끝에 정리 해보도록 하자.)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두 이념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영화에서 오히려 눈길을 끄는 장면들은 남한산성에서 고립된 순간 매일 벌어진 주화와 척화의 대립 사이에서 왕의 생각과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시시때때로 바꾸는 간신들의 모습이다. 여기에 영화 전편을 둘러싸고 있는 지배계급과 피 지배 계급간의 대립과 계급 사회의 붕괴를 암시하는 대사와 상황들 역시 눈 여겨 볼만 하다. 전투에 쓸 말이 굶주린다는 이유로 병사들의 추위를 막아주던 가마니를 거두어 말을 먹이는 집권층의 오만함이나, 추위에 얼어 붙어 있는 병사들을 위해 자신들의 피복을 내어주는 것이 권위를 깎는 일이라는 괴변을 둘러대는 사람들을 볼 때는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주화나 척화냐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이 아닌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간의 반복과 불신이 전란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극에 달한 당시의 상황이었다. (임금의 옥쇄가 찍혀 있는 서신을 받고도 가지고 온 사람이 천민이라는 이유로 불신하고, 살해 하려고 하는 모습, 말 먹이를 가지고 병사들과 관리들의 대립하는 모습 등)
영화는 전투 장면의 처절함이나 비장미와 같은 모습, 또는 사실적인 영상미를 추구하지 않고 담담하게 성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보니 영화 자체의 진행의 속도감이나 구성상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점은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남한산성에 있지 않았던 세자의 존재가 초반에 들어 나는 모습이나, 성밖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성안의 대립 상황이 변화하는 내용(1월 초에 경상도 근왕병 4만이 경기도 광주 인근 쌍령에서 대패하는 상황, 충청 감사 정세규의 8000 병력이 험천에서 패배한 상황, 그리고 세자와 봉림대군 (훗날 효종)이 포로로 잡혔던 강화도 전투)이 없이 지나치게 내부의 갈등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지나친 부분이다. 여기에 양국간의 전투력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부분도 아쉽기는 하다. (남한산성에서 조선군과 청군의 전면적인 전투를 1월 16일에 있었고, 이때 조선군이 크게 승리 하였으며, 이후에서 계속 성 밖으로 나가 청군과 싸우면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나 스토리의 전개상 청군의 압도적인 모습이 부각 되는 것이 더 좋게 보일 수 있으니 그것 역시 아주 크게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이런 영화에서 이 정도의 왜곡은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남한산성]은 패배하고 실패한 전투를 그려낸 몇 안되는 전쟁 영화이다. 그러면서도 패배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영웅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왜 그렇게 힘 없이 무너졌는지, 그리고 그렇게 무너지고 치욕을 견뎌내며 결국 지켜낸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 대장장이 날쇠 역시 고수의 대사 중 “저희 같은 것은 나라님들의 명문이나 대의니, 누가 왕이 되느니 하는 것에 관심은 없습니다. 그저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수확해서 겨울을 배 골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기다릴 뿐입니다.”라는 대사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많은 해석과 분석을 낳고 있지만, 그런 해석과 분석을 낳을 수 있기에 [남한산성]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자신만이 감정을 느껴볼 필요가 있는 영화이다.
(영화 스토리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지 않는 분은 여기까지만읽으시길 바랍니다)
1. 영화 마지막에 김상헌은 자결을 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김상헌은 항복 이후 자결하지 않고, 후에 청나라에 끌려가 투옥 되었다가,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조선으로 돌아 왔다. 이후 관직이 계속 제수되었지만 관직을 거부하다 효종 2년에 사망한다. 그가 청나라로 압송 되면서 지은 시조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시작하는 시조이다.
2. 최명길은 주화파의 거두였지만 그 역시 친명배금 정책의 신봉자였다. 삼전도 항복 이후 명나라에 항복의 불가피 함을 양해 해 줄 것을 간청하는 서신을 명나라에 보냈다가 청에 발각되어 청나라에 압송되었고, 인조 22년 고국으로 돌아 온지 2년만에 병사한다. 최명길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인조반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최명길은 조선 시대에 몇 명 안되는 양명학자이다. (양명학은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 또는 성리학에 반발하여 명 시대에 유행한 실용 유학 사조이다.)
3. 수성사로 나오는 이시백은 인조반정시 공으로 공신에 올랐으며,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대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는 무관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문관 출신이며, 병자호란 이전에 병조 참판을 하다가 수성사에 임명되었다. 실제 기록상 남한산성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거둔 장수로는 이기축, 김류등이 있다.
4. 영화속에서 전형적인 간신으로 묘사되고 있는 영의정 김류는 인조반정시 이귀와 함께 최고의 공신이였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을 보좌한 김여물의 아들이기도 하여 무에 능했고, 문에도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조의 최 측근이자 책사 역할을 했으며, 영화에서 나온것과는 달리 청과의 화친을 처음부터 주장한 주화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