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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년이싸롱 Nov 09. 2023

가족이라는 무게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아시나요?

2.


자려고 누웠을 때, 잠자다가, 밥을 먹다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길을 걷다가, 운전을 하다가,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몰아닥치는 불안을 경험한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거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거나, 경미하게는 온몸이 파동을 느끼거나, 식은땀이 손, 발, 겨드랑이, 이마에 꽉 찬다. 이럴 때면 얼른 알프람정을 먹는다. 작은 분홍색 알약은 신비의 약이다. 나를 지배하던 불안과 공황이 30분 이내에 잦아들게 한다.  

    

처음 심장박동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2015년 여름이었다. 첫 공황증상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을 태우고 밤운전을 하고 있었다. 초보운전이었던 나는 밤운전에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가끔 그런 증상은 아무 때고 이유 없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들이 이 시기에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다. 어떤 사람은 진단을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참기도 하겠지만, 난 ‘시간이 약이다.’라는 믿음으로 초기 치료시기를 놓쳤다.      


어머니의 투병생활의 간병을 도맡았던지라, 내 마음과 몸도 성치 않은 상태였다. 시간이 약이려니, 언젠가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적응하겠지, 모두가 부모를 잃지만 다들 잘 살아가듯이 나 역시 그러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은 더 나빠졌다. 홀로 남으신 아버지는 평생을 어머니의 도움과 사랑에 사셨다. 아버지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투병이 끝나자 늙은 아버지를 책임지는 가사노동자가 되어있었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내 불안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나에겐 언니와 두 동생이 있다. 하지만 언니와 여동생은 출가외인으로 따로 살고 있었고 남동생은 13살이 차이나는 슈퍼막내로 집안일은 전혀 돕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부터 지친 나는 직장으로 현실에서 도망쳤다. 친언니는 만삭의 몸으로 서울로 올라와 내가 하던 자리를 메웠다. 그 후 언니는 백화연질을 가진 셋째를 출산하게 되는데, 이 사실은 또 내가 도망친 탓이라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언니가 대구로 돌아가자, 나는 새벽이면 일어나 아버지 식사를 챙기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아버지 저녁과 집안청소, 빨래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돼버린 것 같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가족이라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 매일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가족이란 나에게 어릴 적부터 불안의 대상이었다. 몇 살 때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낡은 아버지의 봉고차를 타고 놀러를 갔다. 우리 가족과 할머니 이모들까지 함께 한 가족여행이었다. 아버지의 봉고차는 좁았다. 운전자를 포함해서 6인석 봉고차에 부모님, 언니와 나, 여동생 할머니, 이모 두 명까지 총 8명이 끼어 앉았다. 여동생은 이모 무릎에 앉았다. 그리고 다들 엉덩이를 서로 꽉 붙여 붙어 앉았다. 하지만 가장 가장자리에 앉은 나는 엉덩이가 반만 의자에 걸쳐졌다. 그 사실을 말하면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앉을자리 없으니, 넌 집에 있어라’라고 할 것만 같아 엉덩이를 반만 의자에 걸치고 창가에 매달렸다. 엉덩이가 공중에 뜬 오른쪽 다리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린 내가 참 가엾다. 희생적이지 않아도, 꼭 무언가를 내어놓지 않아도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어린아이인데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살아생전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샤워하는 물소리를 듣고 계시다 물소리가 끊겨 이제 욕실에서 나오시겠다 싶을 때를 기다려 밥을 퍼서 상 차리는 분이었다. 밥이 식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게 40년을 사신 아버지는 딸인 내가 어머니처럼 아버지를 서포트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나의 죄책감과 불안과 고통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아버지는 말했다 “딸이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당신들의 삶에서 자식이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신들도 헌신적으로 자식들을 키우셨으니 말이다. 나에게는 감당하기 너무 무거운 자리였다.     


세탁기 옆 구석에 빈 소주병이 늘어갔다. 밤이면 빨래하며 혼자 깡소주를 반 병씩 마셔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늘 식은땀을 흘렸고 불안했다. 회사는 안정적이지 않았고, 일은 재미있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씩 산책을 했다. 퇴근길에 걸으면 속이 답답한 것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울증, 불안장애 등을 앓는 사람들은 매일 햇빛을 보고 산책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고 상담선생님에게 말했을 때, 매일 산책하느냐며 크게 기뻐해주셨다.   

   

2017년 가을, 아버지에게 “독립할게요!”라고 선언하고 방에서 짐을 뺐다. 이사하던 날 아침에 나와보시던 아버지의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눈은 마치 ‘네가 나를 버리냐’라고 말하는 것 같아 한참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열악하고 낡았으며 좁은 내 작은 방은 나에게 안식을 주었다. 37년 만에 나의 공간이, 진짜 가족에게 얽매이지 않는 나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난 이제 누구의 딸도 누구의 동생도 누구의 언니, 누나도 아니다. 난 내 공간을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본 가족의 손을 타지 않는 공간이기를 바랐다. 그저 가족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고 싶었다.      


혼자 살게 되자 증상은 급격히 좋아졌다. 병원을 갈 이유 따위가 없었다. 평온한 일상이었지만 금세 외로워졌다. 아니 갑자기 할 일이 사라지니,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몇 년을 부모님을 위해서 살았다. 물론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아니다. 내 선택이었다.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모른다. 늘 좋으면서 싫고, 갖고 싶으면서도 버리고 싶고 남 주기는 아까우면서 내가 갖기는 싫은 것들이 투성이다. 가족은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없으면 절절하게 갖고 싶은 것 중 하나다.      



TIP. 1. 산책을 해라. 햇빛을 보고 매일 달라지는 자연을 느끼면 좋다.

      2. 가족이란, 한없이 멀고도 가까운 존재임을 인정해라. 김창옥은 가족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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