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차차언니는 반려동물을 적극 권장했다. 반려동물이 위로를 많이 준다는 친구의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턴가 차차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반려동물을 보러 가자고 하기 시작했다. 그냥 구경만 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정말로 들일 생각은 없었다. 내 알레르기 때문이다.
차차언니와 함께 지인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이쁜이'라는 하얀 강아지가 있었다. 이쁜이는 나에게 오고 싶어 했다.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이쁜이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자꾸만 나에게 치대면서 옆에 오고 싶어 해 결국 이쁜이를 결국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와 24시간 병원에 야간진료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그랬었기에 차차언니도 반려동물을 진짜 들이자고 말하지는 못하고 준비도 안 했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러 가자며, 펫샵들을 알아보고 예쁜 강아지들 고양이들을 보여주곤 했다. (나중에 언니는 정말로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차차언니가 반려동물을 간절히 바란다고 믿은 나는 펫샵에 구경을 하러 따라가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곳의 펫샵을 구경하다 어느 날 보름이를 만났다. 23년 2월 5일 정월대보름 날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펫샵 직원이 케이지에서 꺼내어 내게 주었는데, 강아지가 내 겨드랑이 안으로 쏙 하고 파고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따뜻했다. 마치 나에게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것 같아 이 생명체에게는 내가 꼭 필요한 것 같았다.
“나 얘 데리고 갈래” 나도 모르게 강아지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이 보름이를 집에 데리고 왔다. 보름이도 우리가 편하고 좋았는지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배를 까고 대자로 누워 잠을 잤다.
우리가 얼마나 준비가 없었는지, 보름이를 데리고 올 때 펫샵에서 보름이를 싸준 배변패드 2장으로 이틀을 지냈다. 그래도 좋았다. 보름이는 내 얼굴을 핥으면서 날 웃게 해 줬다. 작은 생명체가 쫄쫄쫄 따라다녔고, 행여 밟힐까 발걸음도 조심스럽게 주의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온전히 한 생명체에게 집중하게 되자, 잡념이 자리 잡을 공간이 머리에 없어졌다. 몸을 움직이고 끊임없이 주시하게 되는 존재가 생기자 우울할 틈이 없었다.
난 강아지를 처음 키워본다. 그래서 모르는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유튜브를 통해서 강아지훈련사들 영상을 엄청 찾아보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이미 말티푸 다솜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우리 보름이도 말티푸이다.) 그런데다 보름이를 데리고 온 다음 날 보름이 옆구리에 꽤나 큰 피부병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펫샵에서는 별거 아니라며 약과 소독제를 주고 나을 때까지 연계병원을 통해 치료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의사의 처방 없이 (보름이 몸무게와 상관없는 조제) 받은 약은 먹이기 꺼려졌고 보름이의 치료를 위해 차차언니 없이 동물병원에 가야 해서 외출하기 시작했다. 보름이를 위해서라면 공황발작도 무섭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무더운 여름에는 갑자기 등에 멍울이 2개 생겼다. 결국 지방종으로 확인되었지만, 자고 일어나니 생기고 다음날 또 자고 일어나니 생긴 멍울은 수의사가 보기에도 매우 이례적이고 특이한 케이스였다. 아직 보름이가 어리니 암일 염려는 매우 적었지만, 1%라도 가능성은 가능성이었기에 차차언니와 나는 걱정이 너무 많았다. 멍울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고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매일 보름이를 돌보고 아껴주고 상처부위를 드레싱 하고 애지중지하며 함께 지냈다. 보름이가 아픈 건 너무 슬프지만 한 편으로는 나한테 와서 이렇게 아프니, 돌봐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픈 나도 보름이가 돌봐주고 있다고 여기던 차라, 우리는 서로의 아픈 곳을 돌봐주는 특별한 사이란 기분이 들었다. 보름이가 아플 때면 내가 단단하고 불안을 잘 조절해야 보름이가 덜 불안하고 빨리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에 나는 강해지고 있었다.
보름이를 만나고 낮의 무기력한 일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도 자는 모습도 뛰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가만히 쓰다듬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꼬리를 흔들면서 놀아달라고 깡충거리는 아기강아지는 인형처럼 예쁘다. 그런데 집에 온 지 몇 주가 지나도록 보름이는 한 번도 짖지를 않았다. 불러도 반응이 잘 없었다. 난 심각하게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후에 깨달은 것이 내가 너무 조용히 가만히 있으니 보름이도 그냥 조용히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좀 말을 걸고, 좋은 에너지로 보름이를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기분이 든다. 지금도 보름이는 내 기분을 정확하게 알아챈다. 내가 무기력하고 우울하면 보름이도 하루종일 내 옆에 누워만 있는다.
사실 우리 보름이는 깨발랄하고 성격 좋은 강아지다. 보름이를 위해서 애견카페에도 가기 시작했는데, (난 그전에는 사람 많은 곳은 가지 않았다.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다른 강아지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보름이를 보며 "어머 얘 성격 너무 좋다"라고 말하곤 한다. 처음 보는 낯선 강아지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놀자고 장난을 걸고 하늘로 날아갈 듯 꼬리펠러를 돌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 역시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보름이가 너무 예뻐 내 기분도 매일 환기되고 있었다. 난 점점 서서히 많이 웃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있는 곳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하던 아프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공황발작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어느 날 문뜩 알아차렸다.
또 수면 중 공황발작도 많이 좋아졌다. 더 이상 울면서 발작하는 날들이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자기 전에 보름이를 쓰다듬으면서 매우 좋은 기분으로 잠들기 시작했다. 보름이는 꼭 나에게 붙어서 자거나 내 발밑을 지키면서 잔다. 그럴 때면 나는 보름이에게 보호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한 편으로 내가 더 건강하고 단단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보름아, 고마워.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알레르기가 없었다. 이럴 수 있는 건가?
TIP. 좋아하는 느낌이나 감촉을 생각하고, 잠들기 전 30분 그 감각을 상상해 보자.
나는 자기 전 보름이를 쓰다듬으면서 잠든다. 물론 보름이가 30분을 기다려주지 않지만,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