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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년이싸롱 Dec 14. 2023

차차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아시나요?


12.
죽은 것처럼 사는 날들이 지속됐었다. 상담치료도 가지 않았고, 정신과도 약이 떨어져서 스스로 컨트롤이 안될 때가 되어야 방문하곤 했다. 지난 3년간 7번의 교통사고를 냈고, 정신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11화에서 너무 자세히도 이야기했다.) 그래도 나에게는 룸메이트 언니가 큰 힘이 되었다. 언니 덕분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룸메이트 언니는 차 씨다. 그래서 난 언니를 가끔 차차라고 부른다. 우리는 좋은 동거인이고 서로에게 가족이다. 내가 그나마 힘을 내는 계기는 차차언니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내 무기력증은 집안을 정리하지 않았고, 실수를 연발하게 했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원래도 사이가 좋지 못한 형제들과 '상속재산분할소송'이 시작됐다. 이것 또한 나에게는 큰 스트레스였고, 모든 가족을 잃은(아니 버린) 상실감은 내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차차언니 또한 나만큼은 아닐지라도 내 상황에 대해 화를 내고 스트레스를 같이 받았다. 23년 1월 우리는 인도여행을 함께 다녀왔는데 귀국하는 날 공황에서 친언니의 남편은 차차언니가 단톡방에 거론되자 'ㄱㅎㄹㄴㅅㅂㄴㄴㅁㅅㅂㄹㄴㄷㅈㄹ'이라고 적었다.


"개호로년시발년니미시바랄년뒈져라"

차차언니와 나는 초성으로 욕지거리를 한 것을 보고 단톡방을 다시초대금지로 나왔다. 차차언니에게 너무 미안했다. 형제들은 차차언니가 날 조종하고 영향을 미쳐, 내가 '재산분할소송청구'를 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앞뒤 대화 문맥을 모두 이야기해야하기에 전부 설명할 수 없지만. 99% 확신한다.

차차언니는 물론 나에게 큰 영향을 준다. 아무래도 매일 얼굴을 보고 일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걱정거리 즐거움거리 등을 공유하다보니, 가족보다 서로를 더 잘 알았다. 친구들끼리 같이 살면 싸워서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되거나 진짜 가족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는 후자에 속한다.


5년 전 차차언니가 많이 아팠다. 19년도 구정연휴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다. 원래 담낭에 돌이 있어서 주기적으로 언니는 배앓이를 했다. 그때는 평소와는 다르게 쉽게 가라앉지 않아 구정연휴라고 부산 본가에 갔던 언니가 하루만에 집에 돌아왔다. 너무 아파해서 근처의 분당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당장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고, 진통제만 맞으러 갔던 우리는 병원에서 발이 묶여 언니는 바로 입원하고 담낭제거수술을 했다.

수술 후 언니의 담낭 안에서는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훨씬 큰 돌이 나왔다. 집도의 한선종은 모양이 좋지 못하다고 했고, 담낭암을 확신했다. 조직검사까지 일주일이 걸렸지만, 진단서에는 이미 'gallbladder cancer'(담낭암) 이라고 챠팅을 했다. 보험을 위해서 기록을 발급받아 본 나는 언니가 담낭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퇴원 후 다음 날 언니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수술 중 담도를 찢어먹어서 담즙이 세고 있었다. 응급실에 다시 갔지만 열이 나지 않으니 귀가조치 되었다. 수술을 한 병원에서 담도에 구멍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귀가 시킨 것이다. 다음 왜래진료까지 언니와 나는 정말 오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같이 느꼈다. 분당재생병원에서 입원을 시켜줘서 담도에 구멍이 있음을 발견했고, 진단서에 이미 담낭암이라고 챠팅된 것을 보고 재생병원 의사선생님은 '주치의가 섣부르게 이렇게 챠팅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담도의 구멍을 처지하느니, 담낭암 수술로 한 번에 수술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을 주셔, 다음 왜래진료까지 5일을 마약성진통제에 의지하여 버텼다. 물론 나도 언니와 함께 있었다. 회사를 가지 않았고 쓸 수 있는 휴가를 모두 끌어쓰고 모자라는 날들은 무급으로 처리했다.

왜래진료 날 집도의 한선종은 만날 수 없었다. 병원 측에서 한선종은 이제 병원에 있지 않다며 다른 의사를 배정해줬고, 그 여의사의 첫 말은 "담낭암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였다. 정말 어처구니없이 화가나는 말이었다.

그 후 2달을 언니는 담도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여러가지 처지와 시술을 받았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나는 그때 차차언니를 보살피면서,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었구나를 생각했다. 부산의 차차언니 부모님도 그때 날 너무 긍정적으로 보셔서 아직까지도 예뻐해주실 뿐 아니라, 두 분 모두 날 딸이라고 여겨주신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형제들과도 완전 틀여진 지금은 나 역시 부산의 차차언니 가족들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아낀다.


형제들은 차차언니의 영향으로 내가 단독주택으로 들어가서 사는 것을 거부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여동생은 "언니가 본가로 들어오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다 같이 모여 사는 것 좋다고 했었어."라고 했지만, 막상 내가 당장 갈 곳이 없다고 했을 때 반대한 건 여동생이었다.(친언니는 대답을 여동생에게 미뤘다.) 또한 차차언니가 옆에서 부추겼기때문에 재산분할소송을 제기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처처언니는 변호사 선임비를 지불했을 때도, "그 돈 생각말고, 소송을 언제든지 취하해도 괜찮아. 가족이잖아."라고 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차언니는 늘 나와같이 욕을 먹고, 날 보살펴주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지금도 차차언니는 그 누구의 말보다 내 말을 먼저 들어준다.

본 가족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이다. 내 정신과 치료에 관심이 많고, 심리상담치료를 하고 오는 날이면 내 컨디션이 어떤지 상담치료가 힘들지는 않았는지 날 유심히 지켜봐준다. 그리고 자주 "응원해.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준다. 그럴때마다 나는 흔들렸던 마음을 잘 잡는다. 차차언니와 룸메이트로 같이 살기 전에는 항상 두려웠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내가 돌아가야할 곳은 가족이다"라는 사실이 싫었고 불안했고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가족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있다. 오히려 진짜 가족보다 더 진짜 가족같이 대해주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받은 것이 많아 어떻게하면 차차언니에게 받은 것들을 갚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긍정적이 되고, 고마운 마음에 오늘을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울증으로 일어날 힘이 없을 때도 차차언니에 대한 고마움으로 몸을 일으켰다. 죽고 싶을 때도 차차언니의 존재로 내가 살아야함을 알았다. 나에게 차차언니는 가장 큰 조력자이며, 은인이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위로받고 지지받으며, 세상을 살 힘을 얻는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살아가게하는 원동력이자 행복의 이유일지도. 







공황장애 치료에는 좋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난 내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실마리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공황과 불안이 없어도 좋은 인간관계란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신경증인 공황장애에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꼭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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