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년이싸롱 Dec 07. 2023

성추행과 성폭행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아시나요?


10.
지금 나는 매우 초조하고 손발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알프람정을 두 알이나 먹었고 (의사 선생님은 절대적으로 한 알씩만 먹으라고 했다) 키보드에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챕터를 목차에 넣고 쓰겠다고 호기롭게 기획한 것은, 내 트라우마장애와 불안장애, 공황장애가 다시 심각하게 나빠졌고, 다시 좌절했으며,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이겨내고 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다.
또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발간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DIY가이드의 제목이  '보통의 경험'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성폭력을 당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심리적인 고통을 겪으며 나처럼 매일을 자신과 싸운다.

2022년 7월 20일 수요일 나는 회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내 직업은 사회복지사였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센터에서 11개월째 근무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은 치료안마, 침술 등을 직업으로 많이 갖는다. 지금은 비시각장애인(정안인)도 자격만 된다면 마사지를 직업으로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시각장애인이 안마사 일을 독과점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지정했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 센터에도 시각장애인 근무자들이 많이 있었고, 특히 대표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치료안마사였다. 침도 아주 잘 놓는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다. 센터장은 자랑스럽게 최순실도 안마를 받으러 왔다고 말하곤 했다. (센터장과 대표는 다른 사람이다.) 대표는 정확하지 않지만 80대 노인이다. 평소 좋은 일도 많이 하며, 가난한 아픈 이들을 거의 헐값에 치료해주기도 하고, 센터의 직원들도 근무 스트레스로 근육이 뭉치거나 몸이 아프면 안마를 받고 침을 맞았다. 센터는 직원 복지 차원으로 행해지는 안마시술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다른 직원들도 대표에게 안마를 많이 받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긴장감이 높은 불안장애 환자인 나는 특히 더 자주 안마를 받았다. 언젠가 한 번은 안마를 받으면서 내 긴장도가 높자 “남자 손이 몸에 닿으니 긴장하냐?”라고 말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80대 노인인 점과 회사 대표라는 점에서 난 그냥 넘겼다. 그 뒤로는 먼저 자진해서 안마를 요청하는 일이 줄었고 정말 공황증상이 올 것 같은 두려움이 시작되어야 겨우 한 번씩 침만 맞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연사하셨다. 아무 준비 없는 죽음이었다. 사우나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난 준비되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에 힘들었다. 아빠가 죽어도 별로 상처받지 않을 거라던 나였지만 상을 치르고 나서 회사로 복귀해서도 내 심리상태는 최악이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며칠 간의 휴가를 요청했다. 휴가를 신청하고 퇴근하려는데 대표가 기운이 나도록 좀 만져주겠다며 안마를 받으라고 하였다.
평소와 다르게 안마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고, 안마를 하면서 브래지어 안에 손을 넣어 가슴과 유두를 만졌다. 그리고 속옷에 손을 넣지는 않았지만 성기를 만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회사 대표라는 사실은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 순간 “뭐 하시는 거예요! 하지 마세요!” 할 수 있는 성추행 피해자는 없다. 난 온몸이 굳었고, 두려웠다. 다음 날부터 휴가였기에 귀가한 나는 약에 취해 잠만 잤다. 자면서 공황발작을 했고, 그 소스라치게 싫은 손길이 내 몸을 계속 훑는 기분을 느꼈다. 내 공황장애는 급격히 심해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며칠 후 회사에 사실을 알리고 퇴사를 했다.

퇴사 후, 회사는 사실을 부정했다. 여동생, 룸메이트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여동생과 룸메이트 언니는 회사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어 그들의 연락처가 회사에 있었다.) 그 당시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단언컨대 다른 이는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장소와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내게 실업급여조차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모르는 사실들, 내가 한 말들을 이상하게 꼬아서 말하고 없었던 이야기들을 만들며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상담선생님은 당연하다고 했다. 거의 대부분의 성폭력사건에서 가해자와 그 집단은 사실을 부정하고 피해자를 나쁜 년으로 몰아간다. 그래야 조직이, 그들이 갖는 일상이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상담선생님은 "사람들은 인지부조화를 견디지 못하니, 광년이쌀롱님을 어떻게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내 답답한 마음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깊어졌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과거의 사건까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친언니는 나에게 "너 처음에는 그런 일을 당한 것 같다고 했다가 지금은 성폭행당했다고 하고 있어"라며 내 말의 신빙성을 훼손했다. 난 대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 적이 없다. 말을 바꾼 적도 없다. 여동생은 "내가 어떻게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명예를 회복하게 하겠어"라고 했다. 피해자는 나이고 이미 회복될 수 있는 명예 따윈 없는데, 가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말인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누구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거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기가 나빠지고 금리가 폭등하는 때였다. 나와 룸메이트 언니가 살고 있는 집은 계약만료를 앞두고 있었고, 직장을 잃은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룸메이트 언니가 생활비를 모두 부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유산으로 남기신 부동산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두 의 부동산을 남기셨는데, 단독주택 같은 다세대주택과 근린상가시설을 낀 4층짜리 건물이다. 나를 제외한 3남매는 이미 한 층씩 아버지 건물에서 살고 있었고, 본가 건물에는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내 집 만기와 본가 부동산 세입자의 만기가 몇 개월 차이가 났다. 난 형제들에게 세입자에게 이사비용과 최대 5백만 원까지 위로금을 주고, 몇 개월 빨리 집을 빼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만약 세입자가 거절한다면, 나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도 했다. 단칼에 여동생은 "그건 예의가 아니다."라고 물어보는 것조차 거절했다. 그들은 내 사정과 성추행을 당한 사실과 내가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과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들은 날 비아냥거렸고, 서로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해가며 등에 칼을 꽂았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은 부동산 두 채와 일억이 넘는 현금이다. 어쨌든 부동산에 보증금이 있으니 현금은 없는 돈이라고 치면 부동산을 남기신 것이다. 그나마 그 현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 시신이 사우나 찬 바닥에 누워계실 때 친언니가 본인의 계좌로 모두 이체해 갔다. 친언니가 뺄 수 있는 현금은 모두 이체했다는 사실을 말해서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그 이체한 시간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아버지 빈소도 차려지기 전, 찬 사우나 바닥에 누워계실 때 이체한 것을 후에 계좌내역을 보고 알았다.


"부동산은 누구 명의로 할래?"라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언니는 형제들에게 물었다. 당연히 공동명의겠지만, 본가 건물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면서(자기들은 이미 한 층 씩 점유해서 살고 있으면서) 난 명의만 올리고, 세금만 내라는 건가?

여동생은 공동명의로 하면, "언니한테도 권리가 생기는 거야"라고 했지만 도대체 나에게 어떤 권리가 생기는 걸까? 명의만 있는 권리? 세금만 같이 내는 권리? 난 한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자해를 시작했고(커터칼로 몸을 그었다) 수면 중 악몽에 시달렸으며, 우울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보이기는 싫었다. 혼자 살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룸메이트 언니는 분개했으며 날 돌보아 주었다. 룸메이트 언니에게 망가져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멍하게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냈지만, 룸메이트 언니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연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에서 벗어나고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언니가 오기 10분 전부터 열공하는 척을 했다. 오늘 무슨 기쁜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조잘조잘 떠들 말들을 미리 준비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연기할 거라고, 괜찮은 척 산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그 척하기가 나에겐 도움이 되었다. 그 힘으로 살아낸 것이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읽을 룸메이트 언니에게 많이 미안하다. 




심리상담치료에서 상담선생님과 나는 성폭행당했던 기억을 서랍에 넣고 문을 닫아 잠그는 이미지 기법을 사용했다. 준비가 될 때까지 그 기억은 잊는 것이다. 꺼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준비될 때 그 기억을 괜찮을 수는 없지만 나를 파괴히지 않는 사건으로 만들어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서랍이 열렸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건장한 남자에게 끌려갔다. 뒤에서 입과 코를 막았고 내 몸통을 꽉 끌어안았다. 저항하자 수차례 머리와 을 때렸으며 발로 차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때리다, 사람이 없는 공원으로 끌고 가 나에게 침을 뱉으며 성폭행을 했다. 난 공원 벤치에 머리가 쳐 박혔다. 그 개새끼는 그 짓을 하고 날 벤치에 그대로 두고 내 속옷을 가지고 사라졌다. 한참을 덜덜 떨며 그 개새끼가 돌아올까 봐 움직이지 못했다. 


새벽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간 나는 엄마에게 울면서 말했다. 엄마는 단번에 “쉿!”이라고 무섭게 말하며 화를 냈다. 식구들 깨니 조용히 하라며,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누가 늦게 돌아다니라고 했냐, 죽을 때까지 말하지 마라. 가서 씻어라. 이것이 내가 엄마에게 들은 말이다.
엄마의 “쉿!” 소리는 내 울음을 뚝 그치게 했다. 자세히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괜찮은지를 엄마는 묻지 않았다.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눈물이 계속 흘렀다. 새벽녘 엄마는 내 방에 와서 침대에 걸터앉아 내 손을 잡고 울었다. 나는 자는 척했지만,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날 더 아프게 했다. 나만 참으면 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된다. 괜찮다. 나는 다음 날 맞아서 부은 얼굴로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엄마에게 그렇게 강요받았다. 


그 일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분비물이 많이 나오고 역한 냄새가 속옷에서 났으며, 너무 가려워 의자에 앉아 남들 시선을 피해 가며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엄마는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어린 나는 혼자 산부인과에 가는 것이 무서웠고, 씻는 강박은 다시 심해졌다. 나와 함께 욕실을 공유했던 남동생은 한 번 욕실에 들어가면 두 시간씩 목욕하는 나에게 "무슨 샤워를 그렇게 오래 하냐"며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난 그 뒤로 2년 정도가 지난 후에야 산부인과에 마지못해 갔다. 내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지금까지도 난 부인과 질환을 달고 산다. 그래서 내게 역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늘 인지하게 된다.


정말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일은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난 불안에 시달렸고, 내 성기에서 냄새가 난다고 느꼈고, 매일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외박을 자주 했으며, 술을 미친년처럼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고 울고, 정신을 놓아도 그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엄마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성폭행은 절대로 저항하면 당할 수 없다. 제대로 저항하지 않으니까 당하는 거다” 이 말은 나를 나쁜 년으로 만들었고 내 탓으로 만들었고 수치심을 줬다. 그런데도 난 엄마에게 집착했고, 괴로움과 불안함에 몸부림쳤다. 엄마의 말대로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참고 있으면 언젠가는 없는 일이 될 거라고 믿었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첫 상담치료에서 난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담치료를 하면서 깨달았다. 왜 내가 길에서 침을 뱉는 사람을 보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내가 왜 하루에도 여러 번 팬티를 갈아입고, 뒷물을 자주 하고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사는지 말이다. 늘 불안에 시달리고, 과하게 웃으며, 약 먹은 사람처럼 경쾌하게 굴고 왜 엄마의 투병에 집착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사실 “엄마에게 아직 복수하지 못했어. 아직 엄마는 죽으면 안 돼”라는 마음으로 투병에 집착했다.

회사 대표의 성추행으로 난 마음의 서랍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가족을 버렸다.










TIP. 1. 만약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누군가 당신을 안아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탓이라고 한다면, 그와 인간관계를 끊어라. 그게 가족이든 연인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당신이다.
2. 은유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고통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학인들에게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을 당부했다. 상처는 덮어두기가 아니라 드러나기를 통해 회복된다.


이전 09화 다르게 생각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