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브런치스토리에 내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어머니를 이렇게 나쁘게 써도 될까?' 하는 고민을 했다. 평생을 두고 보면 365일씩 평생을 나쁘기만 한 분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객관적으로 내 경험을 담담하게 쓰고 싶었다. 심리적인 고통은 '사건'도 물론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나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황장애의 치료 중 인지행동치료는 '다르게 생각하기'가 그 핵심이다. 이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영화 <라쇼몽>에서는 남편, 아내, 산적이 남편의 죽음을 두고 각자 다른 진실들을 말한다. 명백해 보이는 사건이지만, 진실을 알 수 없다. 세 사람의 진술이 모두 다르다. 모두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변명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진술한다. 물론 나무꾼이 목격하여 진실을 알고 있기는 하다. 나는 나무꾼이 돼 보기로 한다. 내 이야기를 남 이야기 보듯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정직할 용기를 내어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본다.
내 어머니는 충실한 아내였고 도도하고 자존심이 센 완벽주의자였다.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서예를 배우면 붓이 닳도록 쓰고 또 쓰고 또 쓰는 사람이었다. 한국무용을 배우면 발바닥이 걱정될 정도로 연습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또 뻔뻔한 면도 있어, 큰 이모가 이혼할 때 그 집 세간살이를 거의 다 털어오다시피 가져왔다. 엄마의 그런 면은 자식 양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습지를 풀면 다 지워서 다시 풀게 했고, 음악을 하는 여동생은 매일 연습을 녹음하여 듣게 했다. 친언니는, "어릴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못했어. 엄마가 '여보세요. 너 누구니?'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무서워서 말이야"라고 엄마를 추억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중학교에 가야 할 무렵 집이 폭삭 주저 내려앉아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공부를 곧잘 했고 당연히 학교동창들은 엄마가 중학교에 갈 거라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했고, 십대의 나이에 서울로 상경해 공장에서 일했다. 6,70년대의 흔한 K-장녀의 인생이었다. 어린 여공으로 집에 돈을 부쳤으며, 밑으로 여동생만 넷이 있는 집의 장녀로 가족들을 위해서 살아냈던 청춘은 흔했을지언정 아팠을 것이다. 이모들은 엄마가 보내는 돈으로 학교를 다녔다. 외할아버지는 술만 드시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허우대 멀쩡하고 똑똑했지만 무능한 가장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할아버지가 똑똑하고 잘 생겼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공부하지 못했다고, 그런 아버지 때문에 외할머니가 불쌍했다고 했다. 엄마는 공부를 정말 하고 싶어 해서, 50이 넘어 내가 쓰고 가르쳐 준 알파벳을 공부해 길거리 영어간판을 읽게 되자 너무 기뻐했었다. 한동안 외출만 하면 간판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아들을 낳지 못해(딸만 다섯을 낳아) 외할아버지가 밖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인지 엄마도 아들을 낳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낙태를 여러 번 해서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들을 낳은 엄마는 산후우울증이 심했다.
어머니는 자식이 넷이나 되었고, 본인도 부족한 애정과 회한이 많은 삶을 사셨다. 그런데다 난 어릴 적부터 똑 부러지는 면이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콩나물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콩나물이 없자 그냥 돌아오지 않고 가겟집에서 전화를 빌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언니가 새 장난감을 빼앗기고 들어오자 나가서 찾아왔으며, 한 번은 밖에서 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씩씩거리며 들어와 아버지 따귀를 때렸다고 한다. (후에 아버지는 그때 버르장머리를 제대로 고쳐놨어야 했다고 나와 부딪힐 때마다 소리쳤다.) 엄마가 여동생을 낳았을 때는 외할머니가 시켰지만(외할머니는 특별한 분이었다), 6살이던 내가 미역국을 끓이기도 했다. 취학 전 볼거리를 앓았을 때는 혼자 약국에 갔다. 엄마는 돈을 주지 않고 외상으로 약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때는 동네에서 누가 누구네 집 아이인지 다들 알고 살던 때다. 난 약국에서 서럽게 울기는 했지만, 어쨌든 혼자서 볼거리를 설명하고 약을 외상으로 받아왔다. 엄마에게 나는 그냥 둬도 되는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이 된 친언니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밖으로 돌았다. 화장을 했고 담배를 피웠으며 가출을 했다. 엄마는 소위 날라리가 된 언니가 걱정이었고, 7살 난 여동생이 예쁘고, 금쪽같은 아들은 귀했다. 나는 엄마의 칭찬을 받고 싶어, 학교가 끝나면 부리나케 뛰어 집에 와 아기인 남동생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주고 돌봤다. 그즈음이 내가 된장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아이였을 때다.
난 가족들의 눈치를 많이 보며 자랐다. 특히 외할머니와 이모 둘이 함께 살 때는 이모들 방에 놀러 가고 싶은데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기에 언니는 그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언젠가 명절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고는 자연스레 이모들 방에서 이야기 꽃이 폈다. 하하 호호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동갑내기인 이종사촌 남동생이 방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으면서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웃음소리가 더 크게 났다. 문을 열어주라고 하는 어른은 없었다. 난 방고리를 한참이나 붙잡고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엄마가 이모들에게 크게 화를 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엄마가 내 편이 되어주는 것 같아 조금 덜 서러웠다.
둘째 딸은 눈치 빠르게 엄마를 도왔다. 그 버릇은 나이가 들어서도 습으로 나에게 박혀서, 딸 셋 중에 집안일은 내가 제일 많이 했다. 형부가 언젠가 "이 집에서 일은 광년이싸롱 혼자 다한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때 여동생은 "나는요? 나도 많이 해요"라고 하자 형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했다. 난 그게 좋은 건 줄 알았다. 그런 나였으니, 엄마는 내게 더 무심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몇 년간은 혼자 구정, 추석, 제사상을 혼자 다 차려냈다. 여동생은 명절이면 공연이 있다던지 해외에 가기 일쑤였고 언니는 시댁에 가든지 오지 않기를 자주 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본가에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내가 다하는 구조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본가에서 독립한 후에도 난 본가 살림에 늘 마음이 무거웠다. 2019년에는 어머니 기일을 끼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여행하면서 어머니 기일에 난 옷과 귀걸이 등의 소지품을 숙소에서 챙겨 오지 않아 잃어버렸고, 종일 생각은 한국의 엄마 제사에 가 있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억척스럽게 돈을 아끼고 모아야 했을 것이다. 산후우울증도 심했고, 엄마도 자식 넷을 키우는 엄마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엄마는 “난 너희 아빠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저 성실하고 내가 능력이 없어서 같이 살았다.” “내가 아들을 낳으려고 얼마나 많이 낙태를 했는지 몰라. 그 죗값을 이렇게 받는 거야” “네 아빠는 나 죽자마자 다른 여자 안방에 들일 거다” “내가 능력만 있었으면, 너 생겼을 때 너희 아빠랑 안 살았다”등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들을 나에게 쏟아부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날 믿고 의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런 속마음들을 털어놓는 거라고 여겼다. 내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는데 말이다.
한 편으로는 엄마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는 면도 있지만, 내가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는 엄마로서 사람새끼 아닌 강아지도 똥꼬에 똥만 묻어도 닦아주는데, 그 어린 사춘기의 아이를 왜 그리 방치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까. 난 엄마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선택한 거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술집에서 여동생은 공격적으로 나에게 따져 물었다.
"도대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난 열이 40도가 넘어 몸이 펄펄 끓는 엄마를 위해 119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병원에서는 처치를 거부하는 아버지를 "저게 무슨 남편이야!"라고 소리쳤었다. 또 더 이상은 음식을 넘길 수 없고 입 안이 녹색으로 변해버린 엄마에게 콧줄을 끼우지 않고, 그냥 아사시키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에 분개했다. 그건 그냥 암묵적으로 아버지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구성원의 합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최소한 일상을 던져버리고 엄마의 간호에 매달리는 내 의견을 물어주어야 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제대로 된 처치를 해주는 게 맞다.
형제들은 내가 아버지를 무시하고, 엎신 여기며, 잘난 척하는 년이라고 여겼다. 내가 그들에게 가족구성원이었다면 최소한 내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에 고맙게 여기지는 못해도 날 고깝게 보진 말아야 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한 면이 있다면 험담을 할 것이 아니라, 날 도와줬어야 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더 분노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이지 못해 충동적인 계획을 하는 아빠. 아빠는 엄마의 교모세포종 진단을 나와 내 지인까지 셋이서 들었다. 그리고 첫마디로 '우리에게 너무 큰일이 생겼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아라. 나중에 아빠가 이야기하겠다'라고 했다. 난 아빠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아무에게도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함께 진단을 들은 지인(엄마 뻘이 되는 어른이며, 예약 없이 손꼽히는 신경외과 교수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다.)은 아빠가 내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형제들에게 이야기하기를 권했다. 어릴 적부터 나를 싫어하는 언니가 부담스러워 형부에게 전화를 했다. 이 일로 나는 6살 차이 나는 여동생에게 "형부가 지 남편이야?"라는 끔찍한 험담을 듣기도 했다. 아빠는 다른 형제들에게 끝까지 엄마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고 형제들은 내가 엄마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탓하며 병원에 가서 의료진을 만나면 녹음을 해서 보내라고 요구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다시피 동의 없는 녹음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궁금하면 자기들이 병원진료시간에 함께하면 됐을 일이다. 그런데 난 그때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를 더 힘들게 하는, 아빠가 만든 엄마의 변기(이미 환자용 변기는 너무 잘 만들어져서 판매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시기에 제대로 된 처치와 보호를 하지 않는 아빠, 항암과 방사선 치료로 면역력이 떨어져 있어 주변이 깨끗해야만 하는 엄마를 위해 매일 두세 번씩 손걸레질을 하는 둘째 딸과 소파에 앉아 발만 들어 올리고 텔레비전을 보는 아빠, 뇌가 암세포에 점령당하자 마비증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변비로 고통받는 엄마를 위해 관장하는 것을 나에게 맡기는 아빠, 엄마가 뇌수술 직후 중환자실로 옮겨지자 '의료진이 보호자를 언제 찾을지 모른다'며 둘째 딸을 며칠 동안 보호자 대기실에서 쪽잠 자게 만든 아빠. 다른 가족들은 다 집에 가는데 왜 내가 혼자 며칠을 앉은 상태로 대기실을 지켜야 했나. 그건 당연히 아빠였어야지.
난 아빠를 향해 분개한다. 조금만 서로 언성이 높아지면 주먹질부터 하는 아빠. 조카 때문에 더러워진 소파를 엄마가 신경 쓰기 시작했다. 병문안으로 손님이 많이 오니 거슬려했다. 그러자 친언니가 소파커버를 보내주기로 했다. 소파커버가 몇 주가 지나도 오지 않자 확인했는데, 친언니가 잊어버렸단다. 그래서 종일 소파를 골라 엄마 마음에 드는 100만 원이 넘는 소파를 주문했는데 다음 날 친언니는 소파커버를 보냈다. 난 당황했고 아빠는 일처리를 똑바로 안 한다며 나에게 비난과 폭행을 쏟아냈다. 후에 친언니는 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는 그런 것만 기억한다"며 나를 비난했지만, 어찌 잊겠나 그 억울하고 잔인한 폭행을.
다른 형제들이 나였다면, 과연 여동생은 나에게 "도대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라고 따져 물을 수 있었을까? 나처럼 아빠에게 당해봤다면 과연 나를 비난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이라 몰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입장차이는 이렇게나 크다.
물론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는 좋은 가장이었다. 돈도 잘 벌었고(내가 어릴 적엔 가난했지만) 워커홀릭이셨다. 그저 50년대 생인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렇듯, 집 안의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신경 쓰지 않는 돈 버는 기계로 사셨다. 아버지의 그런 희생을 인정한다. 그 덕에 과외공부도 해봤고 동생들은 돈 많이 드는 음악을 하고 있으며, 언니와 여동생은 결혼할 때 남편들이 집 장만을 해오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두 사랑했다. 아니 가족들을 모두 사랑한 분이다. 다만, 서툴렀던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빠와 나는 엄마를 간호하며, 많이 부딪혔다. 난 시간을 갖고 아빠와 엄마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기를 해보려 했다. 혹시 내가 아빠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닌지도 성찰해 보았다. 엄마의 방관과 학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다. 그럴수록 더 어린 시절, 더 예전의 나쁜 기억들만 계속 떠오른다. 끝도 없이 쓸 수 있지만 더 이상 쓰지 않겠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